이 저서의 목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판소리의 내재 원리라 할 수 있는 ‘이면론’을 토대로 창극의 이면론을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창극의 다양한 표현 방식과 ‘내적 의식’을 논하는 것이다. 이는 그간 창극의 ‘양식화 마련’이라는 패러다임을 ‘시대적 흐름에 따른 예술·사회·문화적 의식 구현’에 대한 논의로 전환하는 것이다.
--- p.24~25
판소리를 근간으로 한다는 장르적 특성에 따라 철저히 사설에 근거하되 제작진의 문화적, 사회적 의식을 반영한 시공간적이고 시청각적인 무대 형상화를 통해 내적 의식을 구현하는 것을 창극의 이면이라 할 수 있다.
--- p.58
춘향으로 분장을 한 배우가 어사가 된 이 도령을 보고 있다는 장면의 묘사는 신위가 57세였던 1826년 무렵에 역할이 분화된 창극 공연의 한 장면이라 추측된다. 소리꾼 한 명이 부르던 레퍼토리를 여러 소리꾼이 분창하는 공연 형태는 1902년 협률사에서 이루어지기 이전에, 또 청국인들의 〈삼국지〉 공연을 보면서 ‘판소리의 동시대성’을 고민하던 시점에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 p.74
인용문 ⑤는 움직임 연기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기생들의 소리 기량을 칭찬하고 있는데, 이를 보아 한남권번의 〈춘향연의〉가 초보적인 형태를 넘어선 창극 형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인용문 ⑥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의 희극적인 움직임도 이제는 외설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으로 비난받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장면으로 기록되고 있다.
--- p.126
입체창은 이러한 ‘잘 만들어진 창극’ 형성 이전의 형태로, 일축 《춘향가 전집》에서는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키는 극적 환영이 구현되기보다는, 2인 무대가 펼쳐지는 듯한 소리의 공간 속에서 중간중간 제3의 소리꾼이 넣는 추임새까지 녹음되면서 ‘판소리의 여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 p.156
창극 유성기 음반은 3분 내외로 녹음할 수밖에 없는 매체적 특징으로 인해 즉흥적인 판소리 공연과 달리 더늠 중심의 대목별 대화 방식을 강화하면서도 ‘처음-중간-끝’을 모두 녹음하는 완결성을 보인다. (…) 이것이 무대 공간의 상상력으로 확장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시청각적 창극 무대화에 대한 상상력이 구체화되는 과정에 창극 유성기 음반이 놓여 있는 것이다.
--- p.179~180
동양극장의 친일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창극 제작에 참여하여 창작극 레퍼토리가 많이 늘어나고 구성에서 연극적 대사가 확대된 것이, 창극 장르의 연극성 강화로 체계화되지 못하고, 판소리 음악을 위축시키고 일제의 황국신민화에 기여하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창극은 기형적인 형태의 과도기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 p.223
그러나 여성 국극에서는 극 중 인물들이 철저하게 이성애 중심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관객들이 남역 여성 배우에게 동성 친밀감을 느끼고 무대에 서는 출연진들끼리도 동성 친밀감을 느꼈다는 인류학적 고찰을 부정할 수는 없다. (…)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여성 역할도,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덕을 갖춘 남성 역할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이성과 결혼하는 것’이다.
--- p.240
위 인용문은 마지막 대목에서 장비가 사라지고 난 뒤 놀보와 놀보 처가 흥보와 흥보 처에게 용서를 구하고 흥보가 기쁜 마음으로 놀보와 재산을 나누며 살겠다고 말한 뒤 마당쇠가 하는 말이다. 마당쇠는 지난 일들이 현실이 아닌 꿈속에나 일어날 만한 일이었다고 여기는 듯하다. (…) 즉 마당쇠를 통해 관객들에게 흥보 이야기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우화적인 이야기임을 말하는, ‘이것은 허구적인 극입니다’라는 ‘서사적 연극성’을 강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 p.280~281
창작창극 〈광대가〉에서 ‘계급 간의 구분을 해체하며 평등을 향해 가는 꿈’이 구현되었다면 〈부마사랑〉에서는 ‘민초, 사대부, 불교, 왕실 문화의 공존’을 중시하면서 이와 더불어 ‘사랑’의 주체들에 있어서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 구현되었다.
--- p.313
토끼의 수직 연기와 별주부의 수평 연기는 일반적으로 ‘수직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지배자와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서민들’이라는 의식과 괴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토끼는 용궁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별주부는 입신양명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표리부동한 연기’를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토끼와 별주부의 표리부동함’이라는 심화된 이면이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347
〈청〉은 충, 효라는 유교적 가치를 반복하지 않고 소녀가 비천한 삶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그 길을 가는 것을 형상화하였다. 그런데 이 장면은 관객에게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한 노인 관객은 “딸 하나밖에 없는 심봉사는 실수를 했지만 현재도 이런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 부모 자식 간에 고귀한 사랑이 엷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노년들 먼저 자신의 마을을 다스려야 할 시대다”라고 평을 한다.
--- p.363
희곡의 무대는 간헐적인 총포 소리, 비행기 소리 등 청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전쟁 상황임을 암시하고, (…) 외부 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규제되는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비해 창극 〈산불〉은 (…) 점례와 규복의 사랑 공간을 대밭 전체로 설정함으로써 생명력 있는 열린 공간 이미지를 구현한다.
--- p.408
네 명의 연출가들이 무대화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적벽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구현한 것은 〈적벽가〉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 기여한 의의가 있다.
--- p.443~444
상좌 다툼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동물은 사슴으로 자신이 이태백과 나이가 같으니 자기가 상좌가 되어야 한다고 노래한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부채를 펴 얼굴에 대는데 부채 속 그림은 스탈린 얼굴이다. (…) 이렇게 육지 공간이 프라이어에 의해 번역될 때 서구 현대사가 반영되면서 ‘동시대성’을 지니게 되고, 디스토피아는 〈수궁가〉에만 있는 세계가 아니라 전쟁과 독재 그리고 국가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현재로도 해석될 수 있다.
--- p.484~485
동구: 나는 매일같이 화장을 하지, 이 방에서만. 수염이 짙어지는 까칠한 턱도, 툭 튀어 나온 목젖도 내 것이 아닌 게 되지, 이 방에서만. 눈썹을 정리하고 아이라인을 그려볼까. 두껍게 끝을 올려 자신감 묻어나는 눈빛의 여가수가 되어보자. 붉은 립스틱 내 입에 바르며 노래에 색을 입히자. 오∼ 싱글 레이디
--- p.502
창극 〈나무, 물고기, 달〉은 ‘원천강 본풀이’와 ‘칼파 타루’ 그리고 ‘월하노인’에서 공통적인 핵심어인 ‘소원 들어주기’와 ‘관계 맺기’를 토대로 한다. (…) 제작진은 아시아권의 신화를 ‘판소리에 근거해서’ 그리고 한국 전통 공연 예술인 탈춤과 굿의 제의성을 활용하여 창의적이고 유연한 창작창극을 만들었다.
--- p.524~525
창극은 이제 태생적인 식민성을 극복하고 또 미적인 감수성을 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생명 존중 의식, 평등한 성적 정체성, 그리고 열린 장르고 진화하고 있다. 창극의 이러한 면모는 관객 중심의 대중성을 넘어서 생명 중심의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삶의 정치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제 창극의 문화적 위치는 비주류와 주류에 있지 않으며 창극의 주체와 관객들이 모두 삶의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삶의 정치성을 구현하는 ‘지금-여기’에 놓여 있다.
--- p.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