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하는 20세기 한중관계는 바로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격변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마찬가지로 서구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아식민지亞植民地, semi-colony로 전락한 중국의 관계가 어떠한 구조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밝히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아래 식민지에 버금가는 처지에 놓이게 된 중국과, 아시아의 신흥 열강 일본의 식민지로서 국가적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한국의 관계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20세기 전반기 한중관계사”에 해당한다. 이렇게 볼 때 20세기 전반기의 한중관계는 아식민지와 식민지 간의 동지적 관계를 가지는 한편으로 식민지 한국의 아식민지 중국에 대한 의존과 중국의 전통적 중화체제로의 회귀라는 다면적·비대칭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존성, 회귀성 및 비대칭성을 일차적으로, 그리고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 근대국가에 대한 모색 단계로서의 중국의 공화혁명, 곧 신해혁명과 연동하면서 전개된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의 공화(민주)와 독립(자주)에 대한 지향과 이를 둘러싼 한중 간의 협력, 길항관계가 될 것이다. 이른바 중화제국체제의 와해라는 위기현상은 신해혁명의 또 다른 면모인 것이다.
---「제1장 - 동아시아 공화혁명으로서의 신해혁명과 한국(1903~1913)」중에서
중국혁명의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되는 경우는 1913년 초에 상하이·난징으로 망명해 갔던 정원택한테서도 확인되고 있다. 정원택은 1912년 초에 대종교 쪽과 연줄이 닿아 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1년을 지낸 뒤 1913년 초에 다시 상하이·난징 쪽으로 유학을 갔던 것인데, 그의 중국 망명 결심은 당시 한 선비로부터 ‘중국에서 쑨원과 황싱黃興을 중심으로 한 혁명운동이 한창이고 뜻있는 한국의 청년들도 다수 참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또 1912년 초에 난징에 망명하여 기독교병원에서 일하며 그곳의 정치지도자들과 교류를 하고 있던 이태준李泰俊도 1911년 말 친구인 김필순金弼淳과 함께 망명을 모의하게 된 것이 “일제의 폭압으로 불만이 쌓여가던 중에 마침 이웃 대륙에서 혁명군의 소식이 천하에 진동하자 이에 감격되어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3년 4월경에 상하이로 망명해 간 김규식金奎植의 경우에도 신해혁명(우창기의)의 성공이 주된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제1장 - 동아시아 공화혁명으로서의 신해혁명과 한국(1903~1913)」중에서
5·4운동 발발 전후까지 계속된 3·1운동에 대한 중국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3·1운동의 반일 독립 주장과 산둥문제를 둘러싼 중국인들의 반일 주장을 하나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3·1운동 직후인 3월 14일자 『대공보』 제1면에는 중요기사로 「강화회의에 대한 로이터통신路透社의 보도」를 다루고 있는 동시에 베이징의 영자지 『Peking and Tientsin Times 京津泰晤士報』의 보도를 인용하여 「한인독립운동의 추가 소식餘聞」을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니 바로 옆에 붙은 이 기사들을 보는 경우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산둥문제와 한국의 독립문제가 모두 일본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게 마련이다. 『대공보』의 경우, 3·1운동 내지 한국독립운동과 파리강화회의 내지 산둥문제를 병렬하는 이러한 보도는 그 후에도 연이어 나타나고 있었으니 3월 26일자, 28일자, 29일, 4월 13일자, 14일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를테면 5·4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시기 중국인들에게 3·1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산둥반도를 회수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창구였던 것이다.
---「제2장 - 1910년대 동아시아의 반제민족운동과 한중연대의 모색」중에서
여운형의 중국혁명에 관한 관심은 중국혁명 영수 쑨원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여운형이 쑨원을 처음 만난 것은 1916년 『자림서보字林西報』 기자였던 천한밍陳漢明의 소개를 통해서였는데 당시 여운형의 쑨원에 대한 첫인상은 쌀쌀하고 교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1918년 11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로 탕샤오이唐紹儀, 쉬첸徐謙, 장타이옌章太炎 등과 상의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쉬첸의 소개로 쑨원을 다시 만난 이후 여운형의 쑨원에 대한 인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당시 쑨원은 여운형을 환대하며 부인 쑹칭링宋慶齡을 소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방정부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우차오슈伍朝樞, 천요우런陳友仁 등과 협조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던 것이다. 그 후 여운형은 상하이 모리아이로莫利愛路(현재의 香山路)에 있는 쑨원의 사저를 자주 방문하여 한국의 독립과 혁명 방안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여운형이 쑨원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4년 11월, 쑨원이 북상北上 도중 상하이에 들렀을 때였다. 쑨원의 도착 소식을 듣고 직접 부두로 환영을 나간 여운형은 그와 함께 사저로 가서 몇 시간을 환담했는데 이 때 여운형이 쑨원의 백발이 많아진 것을 보고 “선생의 머리칼은 더 희어졌으나 선생의 혁명은 더 붉어졌다”고 말하자 쑨원은 “사람의 머리털은 늙으면 하얘지지만 혁명은 늙으면 붉어진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뒤에 여운형이 국민당이전대회에 참석하여 연설하면서 서두에 이 일화를 소개한 것을 보면, 쑨원의 이 말이 여운형에게 남긴 인상이 매우 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제3장 - 1920년대 동아시아 반제연대와 한중연대의 고양」중에서
그리고 중한호조사의 성립과정과 활동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우산이 주도하고 있던 사회단체 중화전국도로건설협회(도로협회)와 그 기관잡지 『도로월간道路月刊』에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던 박은식의 기고와 참여가 있었다는 사실은 ‘중한호조’의 실제적 사례로서 주목받아야 한다. 당대 한국 최고의 언론가, 역사학자이던 박은식은 『도로월간』의 명예논설위원名譽撰述로서 이름을 올렸고 여러 편의 논설을 기고하는 가운데 한국독립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지를 강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 근대화의 출발점으로서 도로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하여 침탈당한 철로 등 경제적 교통 주권을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방안으로서 도로 건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박은식의 논설들은 동시에 반제연대를 통한 국가적 자주와 독립의 회복이라는 한중 간의 공동목표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3장 - 1920년대 동아시아 반제연대와 한중연대의 고양」중에서
한편으로 윤봉길의거가 일어난 지 하루 뒤인 4월 30일 난징에서 관련 신문보도를 통하여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장제스는, “옛날 사마자장司馬子長(곧 司馬遷)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산 개인도 (그 정도가) 정말 심하다고 할 텐데 한 국가의 원수가 되어 원한을 산다면 (그 정도가)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라는 고인들의 말을 인용하였다. 무력을 남용하며 침략을 좋아하는 자들 또한 (이번에) 뉘우치는 바가 있을까?”라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윤봉길의거는 결국 일본이 다른 국가(한국)의 원수가 되어 생긴 일이라는 것이고 이 사건을 통하여 전쟁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좋아하는 일본이 반성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겠다는 것 정도가 이날의 일기에 나타난 장제스의 입장이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원론적 비판에 머무를 뿐, 윤봉길의거에 대한 분명한 지지나 찬양의 입장을 밝히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제4장 - 중일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중에서
그러나 임시정부 측의 독자적인 광복군 출범은 장제스 및 군사위원회 측과의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으니 장제스는 1941년 7월 초 한국광복군의 성립을 인가한다고 하면서 “다만 일정한 한도를 정해야 한다”고 하고 허잉친에게 군정부가 직접 방법을 모색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또 1941년 10월 말 허잉친에게 보낸 지시에서는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모두 군사위원회에 예속케 하고 참모총장이 직접 통일, 장악하여 운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며, 이어서 11월 중순 군사위원회 판공청에서는 「한국광복군행동구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이라는 규정을 만들어 직접적인 통제 정책을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
---「제4장 - 중일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중에서
이상 언급한 장제스의 카이로회담 참가 여부와 회의 일정, 장소를 둘러싼 협의 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보자면 당시 미국의 배려에 의하여 사강에 합류하게 된 장제스로서는 사강회담 참석을 통하여 전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에 참여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미국과 영국의 군사적 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중국의 입장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입장 표명에는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과 군사적 협력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영국과도 여러 가지 문제로 불편한 관계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의존도는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사강의 일원으로 초청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미국조차도 중국이 아시아의 중심으로 자처하는 것에는 노골적인 견제 의사를 표하고 있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사강 진입은 장제스의 말대로 들러리로서의 “허영”에 불과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마디로 대국의 회복을 노리는 장제스로서는 대국의 지위를 받쳐줄 만한 국력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식이든 대국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난국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그런 점에서 카이로회담에 임하는 장제스의 태도는 처음부터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5장 - 태평양전쟁·국공내전 시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의 변동」중에서
요컨대 둥베이 지역 국공내전의 진전 속에서 중국공산당 군대가 초반 국민당군의 우세 속에서도 세력을 유지해가는 것뿐만 아니라 1947년 중반 이후 우세적 위치를 확보해 가는 데에 조선의용대와 둥베이항일연군으로 대표되는 한인 군대의 참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또 북한을 통한 교통로의 확보와 북한으로부터의 군수품 지원, 북한과의 경제적 교역 확대 또한 중국공산당 군대의 우세 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둥베이에서의 국공내전을 비롯하여 전국적 국공내전의 진전과 관련하여 국민정부로 하여금 둥베이 한인과 북한의 중요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제5장 - 태평양전쟁·국공내전 시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의 변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