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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낭만적인 질문

시인동네 시인선-239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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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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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82g | 125*204*10mm
ISBN13 9791158966621
ISBN10 1158966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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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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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머릿속 퓨즈가 예고 없이 끊어지며
세상은 암전(暗轉)되고
뿌리 뽑힌 채 말라가는 나무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
숲을 헤쳐 나오면
침대 머리맡에서 슬픔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했어
추워도 곁불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더워도 그늘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은 채
두 다리 꼿꼿이 세워 살아온 생,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진화(進化)의 열쇠를 훔쳐 날아간 뒤
볏짚이 되어 드러누운 채
텔레비전 속 세상을 배회하는 동안
더 이상 새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어
또렷이 느낄 수 있어
퓨즈를 이어보려는 미련을 잠재우며
침대 아래로 무럭무럭 뻗어가는
슬픔의 뿌리를
---「기립성 저혈압」중에서

으리으리한 집의 잔디마당이 보이는
북한산 등산로를 걸으며
교실 맨 뒷자리에서 시린 발바닥을
번갈아 발등으로 옮기던 아이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직업과 가전제품의 가짓수와
사는 동네의 공기를 들켜야 하는
가정환경조사서를 받아 책가방에 구겨 넣고
잿빛 하늘을 걸어 집으로 가는 길
전파상의 흑백텔레비전에서 본 캘리포니아는 지상의 낙원
최루탄을 피해 교내 도서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졸업할 날을 손꼽던 젊은이를 생각한다
늦은 밤 아버지를 따라 들어오던 깡마른 피로가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젊은이에게
캘리포니아는 너무나 먼 곳

으리으리한 담벼락은 높아만 가고
울타리를 치고 줄 세우는 데 혈안인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자주 울타리를 기웃거리고
권력에 무릎 꿇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야 했던가
캘리포니아 하늘을 떠올릴 때마다 열병 도지던 날은 가고 없다
나를 가두었던 벽은 허물어지고
그리움으로 포장했던 욕망도 온데간데없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말라비틀어진 시구(詩句)를 중얼거리는 지금
캘리포니아는 죽었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중에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우리는 세상에 툭, 던져졌다

힘든 하루를 보낸 날은 호수 둘레를 걸으며
흔들리는 갈대를 바라보면 된다
삶은 고단하고 끝은 공평한 것,
호수에 한가로이 떠 있는 청둥오리도
언 논바닥에서 웅크리고 긴 밤을 견뎌야 한다
어제는 터무니없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
애써 되짚으려 하지 말고
내일은 꽃이 필 것이라 믿으면 된다
아등바등할수록
고여 있던 슬픔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남은 날들을 누추하게 만들 것이다
바닥의 깊이를 예측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우리는 그렇게
가볍디가벼운 존재로 살아가는 거다

어딘가로 다시
툭, 던져질 때까지
---「호반을 걸으며」중에서

붉은 벽돌이
비를 맞으며 오돌오돌 떨고 있다
집회 장소로, 술집으로 손목을 끌던 사람들은
밤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기억하지 않을 말과 구호가 난무하던 거리는
고양이도 까마귀도 울고 갈 뿐
바닥에 드러누운 전단지의 빨간 전화번호가
선거 벽보 속 얼굴처럼 섬뜩하다
최루탄에 쫓기던 사람들의 피난처,
울분이 스크럼을 짜고 함성이 종주먹을 내질러
어둠을 걷어낸 듯 보였지만, 살기 위해서
살아보려고 눈 감고 귀 닫는 사이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허물어졌다
타락한 자는 타락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속이 텅 빈, 철탑 꼭대기의 십자가는
대신 울어주기에 너무 늙어버렸다
눈감은 자여,
촛불은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얼어붙은 땅을 녹일 수도 없다
매립된 진실에서 꽃이 피길 기다리지 마라
깜깜한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낡은 구두들이 눈을 껌벅거리며
명동역 지하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깨어 있는 자여,
밤에도 우리는 깨어
희망 한 움큼 쥐고 어깨를 걸어야 한다
그리고 바라보아야 한다
침몰했던 진실이 드러나는 날
어둠의 정수리를 뚫고 심장으로 내리꽂히는
정의의 시퍼런 창(槍)을
---「명동성당을 지나며」중에서

왈츠를 추듯
발목부츠를 신고
벤츠에 오르는 여자를 보았네

문득
낙엽이 내려앉은 벤치에 앉아
그 여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묻고 싶었네

가을하늘은 왜 슬퍼 보일까요?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흘러도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웃어줄 것 같은
그 여자에게 묻고 싶었네
---「다소 낭만적인 질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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