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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254g | 125*200*17mm
ISBN13 9791185153704
ISBN10 118515370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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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 씨, 기억 안 나요? 우리 대학에서 일본어 교사를 모집한다고 했더니 바로 손을 들고 갈게, 갈게, 꼭 가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다시 한번 건배를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장은 믿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머리가 조금 무거워서 아무래도 과음을 했나 싶은 느낌은 들었지만 설마 한국의 대학 강사 채용에 희희낙락하며 지원했다니, 전혀 기억에 없었다.
“오늘 받은 서류는 공식 초청장입니다. 서류 마지막 부분에 총장 직인이 제대로 찍혔는지 확인해주세요. 세노 씨는 1979년 3월 1일부로 사범대학 객원교수로 임용됩니다. 즉시 미나미아자부 한국대사관으로 가서 노동 비자를 신청해주세요. 그때 공식 초청장이 의미 있게 쓰일 겁니다. 알겠어요? 3월 2일부터 새 학기 수업이 시작되니까 서둘러주세요.”
--- p.18

이와나미서점에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세 권짜리 신서가 출간돼 있었다. 저자는 ‘T·K생’이라고만 적혔을 뿐 알 수 없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인지 일본 또는 다른 나라에 망명 중인 한국인인지 알 수 없었고 단지 원고를 잡지 『세카이世界』 편집부가 정리했다고만 밝혔다. 책은 1972년 10월 17일, 한국에 갑자기 계엄령이 시행되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10월 유신이 단행된 시점부터 시작했다. 이때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인정하는 신헌법이 공포됐고,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모든 정치 활동이 엄중히 금지됐다. 각계각층 사람들이 사태를 씁쓸하게 여기며 비관하고 있음을 알리며 첫 권이 끝났다.
--- p.26

1973년,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이 대낮에 KCIA(한국중앙정보부)에 의해 도쿄에서 납치되어 해상에서 하마터면 살해될 뻔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대학생들은 속속 연행되어 KCIA의 손에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도 연행되어 시체로 발견되었다. 반정부 언설을 드높인 「동아일보」는 정부로부터 광고 철회라는 괴롭힘을 당했고 7개월간 항전 끝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발령된 긴급조치 제9호에 의해 대학은 완벽하게 ‘병영화’되었다. 1976년에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가와 종교인이 나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지만 박 정권은 정부 전복을 꾀한다면서 가혹하게 탄압했다. 500명 넘는 대학교수가 추방되었고 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습격받은 끝에 당 대표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불경기 속 전국 곳곳에서 심각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에 이어 손에 든 서적은 일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가 집필한 『옥중 300일』이었다. 다치카와 마사키라는 청년은 1974년 서울에서 반정부 운동권 학생과 접촉했다는 혐의로 KCIA에 연행돼 밤낮으로 가혹한 고문을 받는다. 그 결과 관계도 없는 ‘민청학련사건’이라는 정치적 음모에 관여했다며 기소돼 징역 20년을 구형받는다. 그는 옥중에서 지인인 시인 김지하와 재회하고 단식투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정치 협상을 통해 석방된다. 이 생생한 기록에는 “KCIA한테 불가능한 것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일뿐이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거 참 엄청난 나라에 가게 되었구나, 한숨을 쉬었다
--- pp.27~28

“한국 노래가 아니잖아?”
“아니요, 우리나라 노래입니다. 얼마 전에 인기였어요.”
“아니야, 사이먼 앤 가펑클이라는 미국 가수 노래야. 벌써 10년도 전에 일본에서 유행했다고. 원래는 영국 민요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노래는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노래에요.”
학생은 양보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물어보니 〈Scarborough Fair〉뿐만이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의 팝에 원곡과는 전혀 상관없는 한국어 가사를 붙여 한국 오리지널 곡으로 많이 불렀다. 그중에는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유명한 가수가 부른 경우도 있고 무명의 누군가가 가사를 붙인 곡이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경우도 있다. 어느 노래든 공통점이라면 적잖은 노래가 남북 분단이나 민주화 투쟁이라는 그야말로 한국의 현실 문제를 노래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노래를 알려준 학생들은 원곡을 모른 채 모든 노래가 한국의 독자적인 노래라고 믿었다.
--- p.106

일본에서 온 잡지와 책을 받으려면 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국제우체국에서 출두하라는 요청이 인쇄된 엽서가 도착한다. 그러면 버스를 갈아타고 신촌 앞 철도 밑을 지나 연세대학교 맞은편에 있는 우체국에 가야 한다. 오전 중으로 시간대가 지정돼 아무래도 출퇴근 러시아워에 맞닥뜨린다. 비틀거리며 버스에서 튕겨 나와 우체국 바깥 계단을 올라가 2층 창구에서 서류를 보여주고 외국에서 온 소포 수령을 신고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수령 절차가 끝날 리 없다. 담당자가 커터 칼로 소포 포장을 거칠게 뜯으면 안에서 나온 책과 잡지에 대해 한 권 한 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와 반정부 관련 문서가 없는지 검사하려는 목적이다.
--- p.114

나는 한국에 와서 ‘학생의거’라는 말을 배웠다. 1919년 파고다공원 앞에서 조선 독립 시위 행진을 시작한 시민들. 1960년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학생들. 많은 희생자를 낸 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지금 의거로 순국한 애국자로 추앙받는다. 1929년 광주보통중학 소년들도 식민 지배의 굴욕에 분노하여 의거에 몸을 던진 사람들로 인정받았다.

과연 일본 역사에서 의거는 존재했을까? 일본인은 세간의 시선이라는 환상에 휘둘리기만 할 뿐 어느 시대든 양처럼 권력에 맹종하고 굴욕을 내면으로 봉인하는 일에 이골이 났던 게 아닐까? 홍기철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본에서는 지식인이 앞장서서 개척한 역사가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학생들은 늘 권력 앞에서 패배했고 그 좌절을 교묘히 내면화하면서 약간의 냉소주의를 선물로 품고 기업 전사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조종하기 쉬운 양떼에 또 한 마리의 양이 방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 p.144

“설마 KCIA로 연행되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바로 김 교수의 안색이 바뀌었다.
“……실은 말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 우리나라의 특수한 사정을 이해해달라고 말한 거예요.”
“제가 신문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니요, 아니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알려주지 않았어요.”
“제가 싫다고 하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해요. 중앙정보부가 직접 선생님을 지명해 대학에 연락했어요. 그저 이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 p.159

이럴 바엔 하루 동안 계엄령하에서 거리를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보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군대가 시내에 주둔한다는 것은 반어적 의미로 치안이 유지된다는 뜻이다. 평소보다 두 시간 빨라진 통행금지를 염두에 두고 ‘구경(관광)’에 충실해보자.

59번 버스를 타고 아침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렸다. 두 시간 전에 비해 탱크 숫자가 늘었다. 도로에 모래주머니를 쌓아놓았고 총을 든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맞은편에 미국대사관이 위치했기에 특히 경계가 삼엄했다. 나는 몇 번이고 병사들에게 검문을 당했고 여권을 보여주며 세종로를 가로질렀다. 경복궁 옆길로 접어들어 프랑스문화원 쪽으로 향했다. 프랑스 영화를 보러 몇 번이나 지나갔던 길이다. 화랑과 세련된 서양식 카페가 즐비한, 서울에서도 유난히 세련된 거리다. 이미 가게 대부분은 태극기를 조기 게양했다.
--- pp.263~264

우파의 환대도 좌파의 비난도 나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느 쪽도 일본 사회라는 작은 그릇 안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물의 진동에 불과하다. 눈앞에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존재했다. 나는 한국이라는 완강한 타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소화해야 좋을지 그 물음에 깊이 사로잡혔다.

1년간의 서울 체류는 예상치 못한 만남의 연속이었다. 만남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결정적이라 요령껏 지식과 정보를 나의 내면에 수납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한국인이 민족이든 역사든 거대한 관념과 씨름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어떻게든 손을 뻗어 만지려 했다. 하지만 너무나 뜨거운 열기에 겁을 먹고 머뭇거렸다. 관념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꾸만 멀어져갔다.
--- pp.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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