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한국 우생학의 역사를 살펴보려는 우리의 의도가 한국 역사의 어떤 부분을 우생학적이라고 낙인찍고 비난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생학을 그저 나쁜 것으로 묘사하며 ‘악마화’하는 것은 우생학이 실제로 차별을 양산하는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안의 우생학』은 우생학의 비윤리성을 드러내는 것보다 우생학이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려한다. 우생학이 어떻게 사회적 약자들을 부적격자로 구분하는지, 그로 인한 차별을 어떻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보건, 복지, 교육 등 여러 분야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의 한 양태를 밝히고 문제 삼으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이런 견해는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열등한 자의 생식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논의로까지 확대됐다. 우생학의 실천에 법적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일례로 1938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내과 의사인 김사일은 일본 후 생성 민족위생협의회가 선천적 장애, 정신질환, 한센병을 지닌 자들에 대해 자손의 생산을 금지하는 이른바 ‘단종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면서 “다소의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국가, 사회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는 입법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대승적 견지에서 이에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브란스 연합의학 전문학교의 교수 김명선 또한 “국민 체질 향상으로 보아서 단종법은 단연 시행을 요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조선에서도 속히 시행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1장 ‘민족성 향상’을 위한 도구, 우생학」 중에서
우생학은 1920~1930년대 전 세계적 의제가 된 산아제한론을 만나면서 성, 생식, 출산 문제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식량 생산의 속도를 초과하는 인구증가의 속도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양적 차원에서의 인구조절 필요성이, 우등한 인구의 증식과 열등한 인구의 감소를 지향하는 질적 인구조절의 필요성과 결합하여 산아제한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켰다. 여기에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에 관한 성적 자기결정권 문제도 개입되면서 산아제한론은 1920년대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산아제한론은 맬서스주의, 우생학, 성과학, 모성주의, 사회주의 등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 「2장 여성의 ‘선택’ 속 우생학의 그림자‘ 중에서
그러나 정부가 모자보건법을 입안하면서 처음부터 우생학적 인구통제를 1차적 목표로 설정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모자보건법의 제정을 통해 인공임신중절을 폭넓게 합법화하고자 했던 정부 입장에서, 우생학적 조항은 법안 제정의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규정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우생학적 조항은 모자보건법 제정 과정에서 반대 여론을 잠재우고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폭넓게 합법화하기 위한 일종의 ‘우회로’로 선택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우회로가 가능했던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했던 우생학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와 무비판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 「4장 한국 가족계획사업과 장애인 강제불임수술」 중에서
사회 전체와 민족, 국가의 발전에 저해가 되는 집단을 ‘사회적 약자’로 이름 붙이고 치료와 돌봄을 표방하며 시설에 수용하는 행위는 우생학적이다. 시설은 아이, 청소년, 성인, 환자, 장애인, 노인, 외국인 등 수용된 이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데 여기에는 항상 재생산권이 포함되어 있다. 성생활을 할 권리, 가족을 꾸리거나 친밀한 관계를 만들 권리, 그리고 자녀를 생산할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하는 시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센인의 사례처럼 특별히 단종수술이나 낙태수술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설 그 자체가 재생산을 제한하는 우생학적 실천이자 실천의 공간인 것이다.
--- 「6장 한센인에 대한 강제 단종과 낙태」 중에서
일부 지식인들도 혼혈아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진단하면서 때로는 이들을 멸시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생리학 교실의 한 교수는 1946년 신문 칼럼을 통해 “대체로 혼혈아들의 유전 인자 결합이 부자연스러운 까닭에 지능이 현저히 저열하고, 치열 부정이 되는 일이 많다”라고 주장했다. 그 의사는 보육 시설을 운영하는 원장의 말을 빌려 혼혈 여아가 태어난다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한국 여성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며, “인류의 적”이라고 지칭할 만큼 나쁜 것이라고 보았다.
--- 「7장 입양에 적합한 아이 찾기」 중에서
결국 부녀보호소는 가족이 없을 시 장애여성을 타 적격시설로 이송 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음에도 당시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여성들을 받아줄 공공 의료복지시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당 여성들을 무작정 퇴소 조치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인데, 퇴소는 방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방치는 애초에 그들을 시설에 유입되도록 만든 요인인 “불건전한 이성관계” 등으로 몰아 성폭력이나 윤락은 물론 그로 인한 임신과 출산의 위험까지 안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성적으로 문란하고 사회에 방치되면 우생학적 위협이 된다고 여겨진 정신적 결함을 가진 여성 중 일부는 부녀보호소에 장기 격리 수용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 「8장 정신적 결함, 성적 일탈, 우생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