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사랑, 진심, 신뢰, 품위, 도리, 연대…. 현대에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가치들이 여전히 우리의 삶에 큰 의미가 된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 이 책으로 막연하게 느꼈던 여러 가치의 실체를 확인한다면, 또 그 가치들을 나의 오늘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이 책의 쓸모이자 역사의 쓸모를 입증하는 일일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는 일」중에서
세상은 위인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이 모여 거대한 물결을 이루듯,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한 시대정신이 결국 역사를 바꾸거든요. 나의 역사가 모여서 우리의 역사가 되고,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가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쓰는 사람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곧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존재가 작아 보이더라도 나 역시 역사의 구성원이자 주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역사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나의 이야기니까요.
---「평범한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중에서
어떤 사건이든 현상만 바라보면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필연을 찾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건이든 표면에 드러난 현상을 넘어 그 배경, 상황, 흐름, 그리고 인과관계를 읽어내는 거죠.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면 한층 깊은 시선과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왜 벌어졌는지, 어떤 날갯짓이 모여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있게 되거든요. 우연에 기대어 해석하는 대신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겠죠.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힘」중에서
혼탁한 세상에 휩쓸려 살기를 택한 사람이 많았다면 일제강점기라는 어둠 속에서 우리 민족은 희망의 빛을 품지 못했을 것입니다. (…)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은 쉽습니다. 손해 보지 않는 결정, 나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리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황현이나 최재형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어요. 해준 것도 없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잖아요. 이런 생각으로 친일파와 매국노를 변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라가 엉망인데 그런 선택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거지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나라가 엉망이라고 해서 자신까지 엉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요. 나라를 핑계 삼아 나까지 부끄럽게 사는 것은 영리한 일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말이에요.
---「황현과 최재형: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의 존엄을 지키는 법」중에서
10만 대군을 끌고 갔음에도 메흐메트 2세는 승리를 놓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난관 앞에서 주저앉는 대신 궁리했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죠. 결과는 어떻습니까? 변화를 준 방법이 통했습니다.
어떤 역사를 뒤져보아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길은 순탄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목표를 이뤄낸 사람들을 보면 더 방법이 없는 것 같은 막다른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변화를 모색하고 그 변화를 통해 해결책을 마련해 냈어요. 그러니 우리도 한 번 더 힘을 내보는 건 어떨까요? 끝까지 고민하다 보면 배를 산으로 보내는 묘수가 떠오를지도 모르잖아요.
---「새로운 발상: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시킨 생각의 전환」중에서
무신정변의 역사는 우리에게 일종의 시그널을 보내고 있습니다. 차별과 불공정이 한 시대의 막을 내리게 할 만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거예요. 무신들을 향한 멸시는 개인만의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당연시된 차별과 불공정한 제도가 결국 무신정변의 계기가 되었고, 끔찍한 숙청과 살육이라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 물론 모두에게 공정한 사회는 어쩌면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공정한 사회가 세상의 기본값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지는 말았으면 해요. 기울어진 세상은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져 내리고 말 테니까요.
---「차별의 한계: 시대의 막을 내리게 만드는 불공정」중에서
육영공원과 명동학교의 사례는 현재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이완용을 키워내고 있을까요, 윤동주를 키워내고 있을까요? 자신의 성공을 위해 공부했던 이완용은 출세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나라의 편에도 설 수 있고, 나라마저 팔아버릴 수도 있는 엘리트로 자랐습니다.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했습니다. 어떤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철학은 없고 그저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요.
---「교육의 목표: 이완용을 만든 교육, 윤동주를 만든 교육」중에서
아직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기에 저는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 그래서 제가 다시 찾은 것이 역사였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은 모두 우리의 인생 선배거든요. 그 삶의 궤적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혹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고 참고하는 거죠.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인지하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정말 다릅니다. 저는 앞서 살았던 이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위안을 얻어요. 인생을 건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들이 찾은 답이 그들의 삶에 담겨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기댈 수 있는 나무 하나가 생기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면 조금 덜 흔들리고, 조금 더 단단해집니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깨달은 행복의 정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