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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말 (큰글자도서)

물의 말 (큰글자도서)

: 제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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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72쪽 | 210*294*30mm
ISBN13 9791172131203
ISBN10 11721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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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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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이란, 보이지 않는 족쇄를 그 희생의 수혜자에게 채우는 것이다. 그 희생이 고귀한 것이었기에 그 족쇄는 천국의 빛으로 반짝인다. 그러나 족쇄는 어쨌거나 족쇄인 것이다. 보육원 원장의 희생은 오늘의 윤아를 만들었지만 윤아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렸다. 족쇄를 한 윤아는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 의학을 공부하여 먼 야만의 땅에서 선교사가 되라고, 원장은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절하게 말했었다.

시어미에게 종교가 있음을 안 순간부터 미현은 10여 년 애써온 전도를 포기했었다. 시어미의 종교는 가족이었다. 그 신앙의 교리는 사랑과 정성과 희생이었다.

님이와 그녀의 두 딸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형성되어왔고 앞으로도 형성될 유대는, 죽은 권개동과 그의 네 아들들 사이에서의 유대보다 질적으로 월등히 견고했다. 이 두 가지의 유대가 가부장제 사회의 의미 체계에서 가지는 중요성의 정도는 물론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후자가 대를 잇는 유대 관계인 반면 전자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를 잇는다는 것의 의미는, 혹은 대를 이음으로써 한 사람이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자신의 윗대와 아랫대를 분명히 함으로써 너무나 짧고 허무하고 불확실한 이승의 삶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씨받이도 하고 씨내리도 하고, 뼈다귀를 따지고 관향(貫鄕)을 따지고 적서(嫡庶)를 따지는 것일까.

꿈속에서 나는 내 얼굴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있었어. 내 두개골 앞면에 밀착되어 있던 그 얼굴들은 체리 술같이 고운 빛깔의 핏방울을 흩뿌리며 떨어졌단다. 나는 창턱에다 체리 술에 담갔다 꺼내놓은 것 같은, 그 젖은 얼굴들을 늘어놓고는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지. 그 얼굴에서 나는 할머니들을 느끼고 어머니들을 느끼고 ‘나’들을 느꼈어. 내가 꿈속에서 본 그 얼굴들을, 너희 딸들과 아들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면.

어느 때인가는 잠자는 이복동생의 기저귀를 벗겨 그 자그마한 고추에 자신의 음부를 갖다 대어보기도 했다. 필남은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그것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러나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것을 가질 수는 없음도 알았다. 그래서 아홉 살 필남은 엎드려 오래도록 울었다. 울면서 똥개에게 고추를 물어뜯긴 병식도 생각하고, 한 번도 자신을 안아주지 않은 약방의 잘생긴 아버지도 생각하였다. 그 사념의 귀결은 언제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엎드려 울고 있는 필남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때부터도 술 잘 마시고 놀기 좋아하던 남편을 통하여 자신이 이브의 후예이자 타락의 원흉임을 알고 어리둥절했었다. 남편에게 데이트강간을 당했을 때는 너무 예쁘고 매력적인 예지의 육체가 그를 죄짓게 했다는 남편의 말에 어리둥절했었다. 결혼 생활은 그러한 뒤바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가령, 남편은 임신한 그녀가 약국 일까지 보느라 피곤하여 섹스 따위는 안중에 없을 때에도 자신의 욕구를 절제한 적이 없었다. 그녀를 안으면서 그가 늘 하는 말은, “네가 젤 좋아하는 것 하자”였다. 나중에는 예지 스스로도 자신이 섹스의 노예이며 섹스로써 남편에게 얽매여 있다고 착각하게 될 정도로 그 전도(顚倒)는 집요했다. 섹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의 의미가 그렇게 남편의 언명에 의해 너무나 쉽사리 뒤바뀌어지곤 했다. 술 상무를 하다 자기 건강이 나빠진 것은 아내가 살뜰하게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바람을 피운 것은 아내가 바깥일에 너무 바쁜 탓이었다.

그래, 언니. 나도 이제는 어떤 다른 존재의 빛살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발하는 빛이 어느 존재에게 가닿아서는 그 존재에게서 여물 만큼 여문 나의 빛이 저절로 또 다른 존재의 고독을 쓰다듬는 꿈을 가져도 좋을지도 몰라. 그래, 내가 받았던 빛을 돌려주어야 할 땐가 봐, 이제. 삶이 어차피 두려운 거라면 그 두려움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땐가 봐, 이제. 웃으면서.
--- 본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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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늘 타자로서 배제되어온 여성의 가치를 생경한 공격적 언어가 아닌 치밀한 예술적 전략으로 옹호하고 있다. 주인공 님이를 중심에 두고 삼대에 걸친 한 집안의 여러 여자들이 펼치는 이 드라마는 ‘조선 딸들의 애사’라고 불림직도 한데, 일제, 전쟁, 산업화, 민주화운동 등 역사의 세찬 격랑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기구한 운명을 실감나게 형상화해내고 있다. 님이를 중심으로 촘촘히 혈연의 그물을 엮어내는 그 구성력은 예사로운 능력이 아니다. 이 소설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자재로운 언어구사 능력에 있을 것이다. 전통사회에는 토속어를, 도시사회에는 지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어느 경우에도 성공적이어서 농촌(과거)과 도시(현재)의 대비가 선명하다. 전통사회를 복원하는 토속어의 능란한 구사를 특히 주목할 만한데, 글 속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이만큼 풍요롭고 구수한 맛을 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 현기영 (소설가)
우리 소설에서 여성 두 세대를 갈라놓은 시공간이 옹글게 포착된 예는 매우 드물다. 차이와 갈등이 도드라지면서 오히려 망각의 늪에 묻혀버릴 때가 많았다. 두 시간대를 무리하게 박음질하지 않고, 섬세한 언어적 파동과 웅숭깊은 지혜의 눈으로 맥맥한 흐름을 보여준다. 이 물줄기가 제도의 경계를 벗어나 관계의 미궁으로 흘러들 무렵, ‘님이’는 사랑하는 딸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녀의 눈에 새로운 적이 잡힌 듯하다.
- 황광수 (문화평론가)
여성들의 삶을 한편에서는 역사의 시간 축에서 파악하고 한편에서는 동시대의 생활 현장에서 살피는 이 소설의 얼개는 매우 지적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더 감동적인 것은 다른 데 있다. 필경 궁핍한 생활에서만 가능할 자연과의 깊고 뼈저린 교감이 그것이다. 지적인 것과 시적인 것이 이 자연을 통해 결합함으로써,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여성주의적 내용은 그 진실성과 구체성을 얻는다.
- 황현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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