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리시아는 13세기 초 영국에서 활동한 유대인 여성 고리대금업자이다. 두 번 결혼했으며, 두 번째 남편은 영국에서 부유한 유대인이었던 데이비드였다. 남편이 죽은 후 재산을 상속받은 리코리시아는 옥스퍼드에서 윈체스터로 이주하고, 고리대금업을 확장하면서 사회적인 영향력도 가졌다. 그는 유대인 사회의 1퍼센트에 속하는 부유한 금융가였다. 그러나 1277년에 자기 집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세 명은 재판에 넘겨졌지만,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리코리시아의 아들 베네딕트는 동전을 깎는 금속세공업자가 되었다. 그는 중세 잉글랜드와 서유럽의 금속 길드에 속한 유대인이었다. 당시 유대인 법령에 따르면 유대인은 기독교 공동체와 접촉할 수 없었는데, 베네딕트는 이를 어긴 죄로 처형되었다. 윈체스터에서 일어난 리코리시아와 베네딕트의 비극은 중세 영국에서 유대인이 당한 억압과 차별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윈체스터: 앨프레드의 명성만이 남은 도시」중에서
에설버트 왕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베르타 왕비가 신앙을 고수하며 지내던 어느 날,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복음 전파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가 이끄는 40명의 선교사를 영국으로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과 친분이 깊었던 켄트 왕국의 캔터베리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문에 이르렀을 때, 이교도인 에설버트 왕은 기독교인들을 거부하고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베르타 왕비는 왕에게 “저들은 내 친구이자 멀리서 온 손님이니, 그들을 대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호소했다. 왕은 결혼할 때 왕비의 종교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을 입성시켰다. 왕은 “대륙에서 온 손님이라면 환영하지만 빨리 떠나길 바란다”라는 메시지를 선교단에게 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받은 왕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세인트 마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서기 596년의 일이었다.
---「캔터베리: 세계 문화유산이 즐비한 교회의 심장 도시」중에서
HMS 빅토리를 보러 왕립해군기지로 가면 유독 배가 왜 거기에 있는지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막상 배가 있는 항구에 도착해서 보면, 이곳이 1495년에 헨리 8세의 의뢰로 만들어진 오래된 조선소였고 가장 오래 살아남은 드라이 독이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드라이 독은 마른 땅에 배를 지을 시설을 먼저 세운 후 배를 만들고, 배가 완성되면 시설에 물을 넣어 배를 띄워 진수시키는 곳이다.
HMS 빅토리는 1765년에 울위치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진수된 일급 전함으로서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넬슨 제독이 최후를 맞은 기함으로 유명하다. 해전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은 배는 수리 후에도 2급 전함으로서 오랫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20세기 초 폐선될 운명에 놓였던 배는 1922년 함대 제독 출신이자 항해 연구협회 회장으로 있던 찰스 도브턴 스터디 경이 《타임스》지에 “승리호인 HMS 빅토리의 보존 가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조상들은 이 배를 자랑하고 이 배에서 받은 영감을 후손들도 똑같이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기고하여 수천 파운드의 공공 기금을 확보한 뒤에 포츠머스 조선소 2번 독에 옮겨져 대대적으로 수리되었다. 그렇게 HMS 빅토리는 언제든 활동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배가 되었고, 선박 박물관의 모습으로 매년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이며 왕립해군기지 내 항구에 놓여 있다. HMS 빅토리는 영국 해군의 영광과 전통을 상징하는 선박으로서 후세에도 존경과 감탄을 받고 있다.
---「포츠머스: 영웅 넬슨 제독을 품은 해군 항구 도시」중에서
대학교의 급속한 팽창으로 많은 학생이 도시 내에 유입되면서 이들이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이 생겨났다. 주민과 학생 사이의 갈등은 1209년에 두 학생이 한 여성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주민들은 법적인 절차 없이 이 학생들을 임의로 처형했고, 이에 학교 측은 불만을 품었다. 이 사건 때문에 일부 학생들과 교수들은 옥스퍼드를 떠나 케임브리지에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했다. 이후에도 옥스퍼드 주민들과 학생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충돌이 발생했고, 결국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앞서 언급한 카팩스 타워가 있는 사거리 동남쪽 모퉁이에 산탄데르 은행 지점 건물이 있다. 이 자리는 원래 1250년에 개업한 스윈들스톡 태번The Swindlestock Tavern이라는 선술집이 있던 곳이다. 이 선술집에서 1355년 2월 10일 성 스콜라스티카의 날에 주민과 학생 간의 최악의 충돌이 발생했다. 사건은 몇몇 학생들이 선술집의 포도주의 품질에 불만을 표시하고 술집 주인과 언쟁을 벌인 것으로 시작됐다. 이 때문에 난투극이 일어나고, 3일 동안 폭력 사태가 이어졌다. 당시 무장 갱단들이 마을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학생들 역시 저항했으나, 결과적으로 학생 63명과 주민 30여 명이 사망했다. 이 충돌을 역사적으로 타운 대 가운Town versus Gown 폭동 사건으로 부른다.
---「옥스퍼드: 어두운 역사를 간직한 대학 도시」중에서
스콘석은 9세기 스코틀랜드 왕의 대관식에 쓰였던 네모난 사암으로, 1296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빼앗아 가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대관식 의자 아래에 두었다. 1950년 이 돌이 도난당한 적 이 있는데, 범인은 스코틀랜드의 대학생들이었다. 스콘석은 다시 잉글랜드로 옮겨졌다가 1996년에 정식으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에든버러 성에 안착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 쪽으로부터 대관식 때마다 이 돌을 런던으로 가져와 대관식 의자 밑에 둘 수 있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 돌려준 것이었다.
스콘석과 함께 전시된 왕의 검(스코틀랜드 국검)은 15세기에 제작되어 스코틀랜드 왕들이 대관식에 사용됐다. 이 검 또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찰스 1세가 처형되자 망명지 프랑스에 있던 찰스 왕자(후에 찰스 2세)가 부친을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을 없애기 위해 1650년에 망명지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크롬웰군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도리어 찰스 왕자가 패배하고 다시 프랑스로 도주했다. 그 과정에서 왕실 관리인은 왕권의 상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천혜의 요새인 던노타 성으로 왕관과 홀, 보검을 옮겼다. 크롬웰군이 이곳까지 몰려오며 위태해지자, 성 근처 조그만 마을 교회의 설교단 아래에 구멍을 파서 왕관과 홀을 묻고 긴 보검은 두 동강 내어서 교회 내부 뒤쪽 긴 의자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겨 두었다. 다행히 이 보물들은 빼앗기지 않아서 오늘날 에든버러 성에 다시 보관 중이다.
---「에든버러: 종교개혁의 성지이자 스코틀랜드의 수도」중에서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얼스터 지역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며 민족주의적 목표를 갖고 있는 ‘공화주의자’와 잉글랜드의 통치를 지지하는 ‘충성주의자’ 두 층이 뚜렷해지면서 이들 사이에 갈등이 한층 심화됐다. 이 갈등의 절정이 1971년 12월에 벨파스트 도심에서 발생한 맥거크 술집 폭탄 테러였다. 공화주의자들이 자주 찾는 술집에서 충성주의자들의 얼스터 의용군UVF이 크리스마스 몇 주 전에 폭탄을 터뜨렸다. 이 사건으로 15명의 가톨릭 민간인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이에 분노한 공화주의자들이 소속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다음 해 7월 벨파스트 시내 여러 곳에서 차량 폭탄을 동시에 터뜨린 ‘피의 금요일’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9명이 사망하고 130여 명이 다쳤다. 벨파스트는 이런 종파 간의 충돌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불렸으며, 도심에 있는 유로파 호텔은 이 기간에 36번이나 폭탄 테러를 당했다.
---「벨파스트: 갈등과 아픔에서 벗어난 북아일랜드의 수도」중에서
플로팅 하버에서 하구 쪽으로 물길을 따라 두 번째 다리(프린스 스트리트 브리지)를 막 지나면 큰 아트센터가 보이는 앞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탈리아 출신의 탐험가인 존 캐벗의 동상이다. 그리고 동상이 바라보는 맞은편 우측에 그가 항해할 때 탔던 매슈호의 복제품이 엠셰드 박물관 앞쪽 강에 전시되어 있다.
존 캐벗은 1497년에 헨리 8세의 지시로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태생의 항해사이자 모험가인 그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에 에스파냐에서 출발해 바하마와 아이티에 도달하면서 열린 대항해시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향신료와 실크와 같은 귀중한 무역품을 구하기 위해 동인도로 가는 새로운 해로를 찾고자 하는 꿈을 품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꿈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자금과 정치적 지지를 구하기 위해 브리스틀로 갔다고 추측하고 있다. 당시 새로운 왕조를 세운 헨리 7세는 그의 계획에 관심을 보였다. 헨리 7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브리스틀을 중심으로 한 독점무역을 장려했다. 그래서 1496년 3월에 캐벗과 그의 세 아들에게 왕실 특허를 내주었다.
---「브리스틀: 신세계로의 첫 항해를 맛본 항구 도시」중에서
킵 내부에 전시된 역사를 둘러보면 콜체스터 성의 어두운 사연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1644~1647년에, 이스트앵글리아 지역의 주민들은 매슈 홉킨스라는 남자의 공포에 떨었다. 그는 자신을 마녀 사냥꾼 장군이라고 칭하고, 조수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중 하나는 악마의 표식을 찾기 위해 피부를 찌르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억지로 자백받기 위해 수갑 같은 도구를 사용해 고문하거나 물고문 등을 한 것이다. 홉킨스는 단 4년 만에 23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마녀로 고발하고, 대부분은 콜체스터 성에 있는 도시 감옥에 감금해 죽음으로 이어지는 재판을 받게 했다. 또 다른 비극적인 역사도 있다. 1648년 잉글랜드 내전 시기에, 왕당파의 지도자였던 찰스 루카스 경과 조지 라일 경은 성 밖에서 처형당했다. 그들의 피가 흘렀던 자리에는 오늘날까지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작은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콜체스터: 로마 제국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도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