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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밭 사람들, 그 후 20년

커피밭 사람들, 그 후 20년

: 커피의 쓴맛이 시작되는 곳의 삶에 대하여

리뷰 총점10.0 리뷰 2건 | 판매지수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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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140*210mm
ISBN13 9788976828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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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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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유명해진 타라수는 그야말로 커피의 고장이었다. 소읍에 불과한 이곳 타라수에서 생산된 커피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게다가 오랜 시간 유럽과 일본이 거대 시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와중에, 이곳 커피가 우리나라까지 간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귀한 커피일수록 여느 첨가물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선 불문율이었는데 정작 이곳 타라수에서 한평생 커피와 함께한 사람들은 헝겊에 걸러 내린 커피에 늘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어 마셨다. 도냐 베르타 역시 늘 당신의 커피에 설탕을 듬뿍 넣었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혹은 허름한 식당이라도 식탁 위에 반드시 설탕통을 둬야 하는 곳이 바로 코스타리카였다. 굳이 뜨겁지 않아도 괜찮았다. 헝겊 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내리는 와중에 식기도 했지만 식사를 위해 커피를 미리 만들어 주전자에 담아 두었으니 어지간해서는 뜨겁기도 어려웠다. 오래전, 코스타리카에서 생산된 고급 커피를 모조리 외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자국민에게 고급 커피 마시는 것을 금했던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이곳 코스타리카 사람들에게 커피는 섬세한 취향을 좇는 기호식품이라기보다는 음식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을 먹듯 그들은 식사 때마다 커피를 마셨고, 힘든 일을 하며 노동주를 마시듯 일 중간중간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하루를 보내는 매 순간 주전부리 간식을 챙기듯 커피를 마셨다. 휴식을 위해서도, 심지어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도 커피를 마셨다.
--- p.53~54

로사의 남편 디모데는 아무리 봐도 가족들을 이끌고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늘 머리가 아파 어두운 축사에 갇혀 지내는 아내 로사에 비해 허우대와 차림새가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매일 같이 커피 수확 작업을 마치고 나면, 늘 단벌 외출복을 차려 입고 다운타운으로 나섰다. 애석하게도 타라수의 서늘한 날씨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름옷이었지만, 해 질 무렵의 추위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쩌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들 가족에겐 타라수의 추위를 견딜 만한 옷이 애초에 없었다. 신사복 바지와 반팔 남방셔츠를 단정히 차려 입고 나서는 그의 모습은 빛도 들지 않는 축사에 남겨진 가족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커피밭 일이 끝나는 오후가 되면 아픈 아내를 대신하여 축사 안의 일을 돌보거나 하다못해 땔 감이라도 마련하면 좋으련만, 그는 늘 한 벌뿐인 신사복 바지와 반팔 셔츠를 차려 입고 서늘한 다운타운으로 길을 나섰다. 어쩌면 그때가 그의 하루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무지 아버지의 인물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아들들은 그렇게 길을 나서는 아버지를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감히 그를 따라나서는 자식은 없었다.
--- p.98~99

‘세쌍둥이’라는 상호를 걸고 연 가게가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게가 망한 이유로 기예르모 가족의 입을 핑계 댔다. 그들이 먹어 치우는 것이 그들이 파는 것보다 많았다는 것이 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안다. 걷지 못해 고립된 기예르모를 위해 가게를 내고 일 년 남짓 그 가게를 운영했던 시절이 이 가족에 게는 또 한 번의 호시절이었다는 사실을. 가게를 하는 동안 엘레나가 내게 여러 번 한 말이 있다. “몬타냐, 가게를 해 보니까 참 좋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게다가 우리가 다른 가게에서 사 먹어야 하는 돈보다 훨씬 싼 돈으로 같은 것들을 먹을 수 있잖아. 그러니까 많이 안 팔려도 괜찮아. 여기 이 가게에 있는 것들은 다 우리가 먹고 쓸 수 있는 것들이니까.” 참으로 희한한 셈법과 경영 방식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 저녁을 먹다가 가장 기예르모가 가끔이지만 호기롭게 감자튀김 한 봉지라도 쏠 수 있었으니, 그리고 때론 팔려고 냉동고에 얼려 둔 닭도 꺼내서 요리해 먹을 수 있었으니 언젠가 이 가족들은 세쌍둥이 가게 시절을 분명히 아름다운 시간들로 기억할 것이다. 망한 것이 아니라 세쌍둥이 가게 덕분에 그들 삶 가운데 한 시절을 아주 풍요롭게 보낸 것이라고, 그들은 기억할 것이다.
--- p.173~175

지난해처럼, 이번에도 좁은 방에 세일링과 누웠다. 그리고 지난해처럼, 이번에도 세일링이 나를 부르곤 혼잣말을 이어 갔다. 자신이 유령 같다고 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 미국으로 간 아버지로부터 소식이 끊기고 속병을 앓던 엄마가 다시 코스타리카로 내려간 후 그녀는 자기 혼자 친척 집을 이리저리 전전하며 살았다고 했다. 오빠 디에고는 멀리 떨어진 농장으로 일을 가 더 이상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살아가던 중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고 했다. 코스타리카에서 엄마가 보낸 브로커였다. 그날로 그 남자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낯선 남자를 따라나서는 어린 세일링을 친척 중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고 그들 중 누구도 세일링에게 옷가지 한 벌 챙겨 주지 않았다. 세일링은 빈 몸으로 그 남자를 따라나섰다. 아니, 남자의 손에 이끌려 나섰다. 그 시절 세일링에게는 따라나서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 p.230~231

그러다 불쑥, 이곳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튀어나왔다. 내가 “우리 이 집 위에 이층 올려서 같이 살자”라고 뜬금없이 말하니 기예르모와 엘레나가 손뼉을 치면서 좋아한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방법을 모색했다. 엘레나의 집은 날이 더운 이곳 페레스 셀레동에서 큰 준비 없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별도의 현관 없이 통으로 벽을 세우고 그 안에 공간을 나눠 마루, 부엌, 방 두 개 그리고 화장실을 두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집을 짓는다. 큰돈 들이지 않고 지을 수 있는 집이다. 중천장은 별도로 설치하지 않고 함석을 얹으면 끝. 그래서 안전상의 이유로 모든 집에 이층을 올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데, 다만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경우에는 이층을 올리는 것이 허용된다고 했다. 김이 샜다. “그럼 안 되는 거야?”라고 묻자 기예르모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 즉답을 내놨다. “우리가 몬타냐 너를 입양하면 돼. 정신줄이 한 오라기 정도 빠진 딸로 입양하면 되는 거야.”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 p.286~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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