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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

가히 시인선-007이동
이화우 | 가히 | 2024년 10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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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5*204*20mm
ISBN13 9791158966669
ISBN10 1158966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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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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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우流星雨가 간밤에
지구 위에 쏟아지듯
당신 것이 아니라서 가끔 되돌아와
그때는, 슬픔이 아닌
슬픔을
놓고 품네
---「이름」중에서

노래에도 나오는 청사포를 가보았네
기억은 오래 익은 향을 내는 걸음처럼
그렇게 무작정 던진 애먼 사랑 청사포
왜, 여기서 가장 큰 슬픔을 묻었는지
이국의 등대 따라 붉은 눈물 지나간 듯
앞서간 물비늘 넘어 찰싹이는 물결들
암초 숨긴 저 깊은 푸른 물빛 사이로
격정보다 먼저 오는 이야기를 흩는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 왔다 갔을 모래 소리
---「청사포」중에서

뇌 속에 처박히는 별을 보고 싶었다
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 우리는
두려워, 별자리에 툭 미끄러질 미래가
---「새비재의 밤」중에서

봄날이 만지지 못한 숱한 새의 눈물처럼
머금은 울음이 가로젓던 옹이들처럼
무뎌진 입술에 남은 아픈 귀의 굳은 상처
질주하던 직선이 갖지 못한 곡선처럼
피부를 가져버린 소리의 비애처럼
오히려 가벼움에도 까닭 없이 남은 유서
치리라, 치워지지 않는 거리의 거리에서
황산벌 먼지 이는 영월 땅의 검은 하늘
한쪽을 거둬 가버린 독재자의 피처럼
---「북」중에서

어렵사리 아끼던 말까지 했나 보다
‘ 0 ’이라 써놓은 표식을 떼어내고
둥글게 각을 다 쳐낸 벼루 한 점 사 온 날
어느 사형수가 수형 중에 다듬었을
깊은 연지硯池에 한가득 물을 채워
물로서 저쪽 세상을 가늠해 보는데
항간에 있을 법한 길을 대신 막고서
뒤를 보면 제 빛이 까만 거울이다
이름을 갈고 난 만행 사경 한 폭 걸린다
---「벼루」중에서

밀주처럼, 누룩취가 스며드는 가을비처럼
폐쇄된 광을 열고, 맑아서 신神인 것처럼
춤추듯 청향 위에서 떨어지는 기억이다
축문을 읽어가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우물거린 탁음 속에 가둬버린 슬픔이
판자벽 옹이에 기어드는 해거름 길 같았다
한 뼘의 손마디가 확대되는 것처럼
소설小雪을 앞에 두고 간지를 꼽아보는
시큼한 냉국 사이로 소름 돋는 눈발이 인다
---「부의주를 빚으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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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우 시인의 시조는 정갈하다. 정갈한 시냇물 같다. 시냇물에는 고풍스러운 윤슬을 담고 있는데 먼 나라 어느 왕조에서 흘려보낸 듯하다. 그의 언어는 단단하다. 그 시냇물에 담겨 있는 찰진 돌멩이들 같다. 물결 따라 구를 때 달그락대는 소리가 맑은. 그 소리를 위해서는 어떻게 굴러야 할지를 잘 아는 영리한 돌멩이들. 조금씩 깊어지는 시냇물을 따라 점점 몸도 커지는 그런 돌들. 행여나 누군가의 발목이 젖을까 기꺼이 손바닥을 들어 올려 징검돌도 되는. 그러다가 점점 깊어져 그 물살에 겁먹은 누군가의 가슴에 묵직이 안겨드는. 급한 물살 앞에서는 머리나 어깨에 올라앉아 절대로 휩쓸리지 않게 잡아주는 그런 돌덩이. 그러다 “비박 한번 하자고 너스레 떠는 돌탑”(「거돈사지에서 비박을」)이 되기도 하고 “형벌을 나눠 가진 돌”(「산음에 들다」)이 되기도 하는. 견고한 상상력의 근원이 되는. 기품 있는.
- 강현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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