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힘들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흘러나왔다. 엄숙할 만큼 고요했던 지하철 안의 모두가 이 말을 들었다. 잠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이었을까? 이 사건을 겪은 날,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서 아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 혼자면 안 되기 때문에, 아들은 나 없는 세상에서도 자신의 삶을 마저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쓰기로 했다.
--- 「프롤로그: 앞으로 네가 살 세상이 조금은 더 살 만하길 바라며」 중에서
아들이 어릴 때는 성인의 몸을 가진 발달장애인은 고립된 상황에 처할 여지가 아주 많다는 것을 몰랐다. 특히 장애 정도가 중증이라면 그 가능성은 하늘만큼 높아진다. 엄마가 아무리 발을 동동거리며 노력해도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아들의 고립을 막을 수 없고, 엄마만이 유일한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들이 어릴 때는 알 수가 없었다.
아들이 어릴 때는 현실을 몰랐다.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고, 학교에 잘 다니고, 자주 여행을 다니며 즐겁게 살면 희망적인 성인기를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면 나는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고 언젠가 마음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정직하게 달렸고 아들은 어느새 자라버렸다. 아들이 자라면서 아들이 사는 세계도 달라졌다. 성인의 몸뚱이를 지난 학령기 아들이 사는 세계,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당사자들이 사는 세계. 빠르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그 세계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내가 발견한 것은 애석하게도 희망이 아니었다. 아들의 고립은 이미 시작됐고 나는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발달장애인의 엄마’로 사는 삶에서 나의 생존이 아들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돼버리면 안 다. 이건 정말 최악의 패다. ‘발달장애인의 엄마’로 사는 이 삶에 특별함이 있다면 매 순간 내 사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라는 말의 진짜 뜻은 “아들이 제발 나보다 먼저 죽게 해주세요”라는 것이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먼저 죽는 삶을 매일 기도하며 산단 말인가. 나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게 평생의 소원인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다.
발달장애인이 왜 갈등 해결 능력이 부족하냐고? 왜 그토록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서투냐고? 그럴 수밖에 없다. 뭘 경험해봤어야, 사람들과 부딪혀봤어야, 그러면서 뭘 배워봤어야 갈등 해결 능력을 기를 수 있지. 갈등을 경험해야 그걸 풀어갈 방법을 배우고 익힐 텐데, 가족 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봐야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 맺기 방법을 체득할 텐데, 아무런 갈등조차 일어나지 못하게 주변에서 철저히 막고 있는데, 어떻게 갈등 해결 능력을 습득하고 타인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겠는가. 사회적 영역은 글로 배우고 머리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조건 직접 부딪혀 체득해야 한다. 책으로 연애의 기술을 익힌다고 실제로 연애를 잘하진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발달장애인의 자립생활에서 매일의 루틴을 형성하는 건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잘 형성된 루틴은 개인의 삶을 건강한 방향으로 이끈다. 하지만 때로는 일부러라도 루틴을 깨고 돌발 상황에 놓일 필요도 있다. 당사자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줄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에, 살아서 옆에서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동안에 그 작업이 시작돼야 한다. 그렇게 돌발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의 역치를 높일 필요가 있다. 그런 경험을 쌓음으로써 돌발 상황에 불안해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치 레벨을 올려야 한다.
--- 「1부 고립이 아닌 공존의 세계로」 중에서
그 순간 아들도 마음의 방어기제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나는 아들이 느리게 성장하는 발달장애인이기에 1차원적인 반응에 따른 본능적인 행동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들도 나와 똑같은 마음의 작동 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명백한 사실이 너무도 당연하게 눈에 보여서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그동안 발달장애인은 단지 발달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인간으로서 갖는 당연한 마음까지도 부정당하거나 외면당하곤 했다. 그것이 내가 마주한 ‘진짜’ 현실이었다. 다르지 않다. 아니, 똑같다. 아들과 나는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홍은전 작가가 쓴 책의 제목처럼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 ‘그냥, 사람’이다. 이것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들은 상실감을 배워야 한다.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상실감에 마음이 타들어가는 경험을 하고, 그 상실감을 애도하는 과정을 통해 슬프고 괴로운 감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아주 먼 훗날 엄마인 내가 없어져도 아들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나의 부재를 애도하면서 상실감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자신의 남은 생을 꿋꿋이 살아갈 수 있다. 아들은 이해, 수현이를 통해 생애 첫사랑과 생애 첫 상실감을 배우고 있었다.
--- 「2부 똑같은 마음, 똑같은 사람」 중에서
아들이 사는 세계가 달라졌다. 이제 아들에게는 기존의 ‘발달장애인’이라는 딱지 외에도 ‘덩치 큰’, ‘중증의’, ‘남성’이라는 세 개 항목이 낙인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아들을 향한 ‘세상의 거부’도 본격화됐는데, 세상에서 거부하는 딱 그만큼의 크기로 아들은 나에게로, 가족에게로 떠밀려왔다. 세상으로부터 집으로, 아들의 고립이 시작됐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아들이 덩치라도 작았다면, 말이라도 할 줄 아는 경증 발달장애인이었다면, 성별이 여자였다면 아들이 사는 세상은 달랐을까. 세상 사람들이 우영우에게 보내던 ‘봄날의 햇살’ 같은 미소를 아들도 받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바로 그 학교에서부터 고립이 시작됐다. 학교라도 다녀서 고립되지 않을 수 있는 게 학령기의 가장 큰 장점인데, 오히려 학교 안에서의 고립이 공고해지면서 아들의 삶은 학교 안팎에서 의지할 데 없는 갑갑한 상황에 놓였다. 이로 인한 더 큰 문제도 나타났다. 기존에 아들이 경험한 고립이 학교 밖인 외부 환경(아들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에 의한 것이었다면, 학교 안에서 경험하는 고립은 아들의 루틴과 성격, 행동에까지 영향을 주면서 아들의 학교 밖 일상에까지 또 다른 파장을 미치고 있었다. 학교 안팎에서 조여오는 고립된 상황에 아들의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단지 중학생이 됐을 뿐인데 아들이 사는 세계가 달라졌다.
이건 어쩌면 교사 개인의 문제나 학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특수교육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 혼자만의 ‘정신 승리’일지도 모른다. 교사를 미워하면 안 되고 학교를 미워할 순 없으니 특수교육시스템으로 화살을 돌려 현실의 괴로움을 회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 들기 시작한 이 생각은 점점 더 크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생각으로 확대됐다. 어쩌면 무기력했던 건 학부모인 나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 학교와 교사도 무기력하긴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수교육시스템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왜 아들이 학교에서 자야만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했다. 수시로 올라오는 분노가 나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리기 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잠식당해 ‘체념’이 삶의 태도로 몸이 익어버리기 전에, 그러다 결국 학령기에 형성된 ‘잘못된 루틴’이 성인기로도 이어져 아들의 미래가 절망적인 고립으로 켜켜이 둘러싸이기 전에.
하지만 해야 할 일을 해야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좋은 얘기만을 입에 담고 어둡고 차가운 진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한다면 고립된 발달장애인은 부모에 의해 살해당하고 살인자가 된 부모는 자살하는 행태가 계속 이어질 테니까. 무엇보다 나도 그리고 당신도 그 행렬에 끼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 「3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행복한 어른 생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