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다는 건 가볍다는 것이고, 가벼운 건 쉽게 변한다. 잔뜩 부풀어 있는 알록달록 풍선처럼, 손에 땀이 나도록 붙잡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 날아가 버릴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 p.9 「오순정은 오늘도」중에서
자기 꿈을 찾고 싶다며, 김종만이 나 몰래 카드를 그어 썼다고 말했을 때 그냥 눈 딱 감고 봐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화를 내고 욕을 퍼부은 건 18년을 함께 살아오며 쌓여왔던 서운함 때문이었다. (중략) 맨날 돈, 돈, 한다고 지랄을 하면서도 자기 엄마 무릎 수술비며 목돈 들어갈 일이 생기면 모른 척 나에게 떠넘겼다.
그런 남편이었지만, 술만 마시면 엄마를 두들겨 패고 돈도 제대로 벌어오지 않던 아버지를 보며 자라서인지 딴짓 한번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것만큼은 고맙게 생각한다. 문제는 김종만의 태도였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은근히 사람을 얕잡아 봤다.
--- p.39 「오순정은 오늘도」중에서
말이 안 통하는 여자였다. 오순정과 문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있었고, 거길 건너느니 차라리 빠져 죽는 게 더 쉬웠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가 나오자 오순정이 콧방귀를 뀌며 빈정댔다. 거위가 그래봤자 거위지, 꿈은 무슨! 거위는 닭을 보고 살아야지 백조를 바라보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오순정에게 나는 정신 나간 거위일 뿐이었다.
--- p.60 「김종만은 오늘도」중에서
“너 같은 무식한 인간이 뭘 알겠냐만,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야, 꿈이 밥 먹여줘? 니가 갖다 쌓아놓은 저 책들, 이사할 때마다 이고 지고 다니는 저 종이 쪼가리 뜯어먹고 살 수 있어? 그렇게 잘난 인간이 왜 나하고 살아, 더 잘나고 똑똑한 년 끼고 살지. 나는 무식해서 다리가 퉁퉁 붓도록 설거지하고 냄새나는 곱창 주무르며 산다. 한 달 내내 일해서 그 돈 받으면, 너네 엄마 요양원에 돈 보내고 애들 학원비 내면 끝이야. 근데 뭐? 사람이 꿈을 가져야 한다고? 너는 내 꿈이 뭔지 알아? 누구는 그런 거 없어서 이렇게 사는 줄 아냐고!”
--- p.61 「김종만은 오늘도」중에서
큰길 사거리에서 롯데리아 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오순정이 일하는 곱창집이 나온다. 옛날 통닭집을 지나려는데 저만치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봉투를 꽉꽉 눌러 채우고도 위쪽으로 높다랗게 삐져나온 부분을 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은 쓰레기봉투를 양쪽으로 거머쥔, 헐렁한 츄리닝 바지에 회색 후드티를 입고 기름때가 묻은 빨간 앞치마를 그 위에 걸친… 사지도 못할 집을 보러 다니는 오순정이었다.
--- p.72 「김종만은 오늘도」중에서
“드레스덴이라는 도시가 있거든. 사람들이 그곳을 독일의 피렌체라고 부른대. 일단 거기부터 시작해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로 건너가는 거지. 그런 다음, 쭉 도는 거야. 발길 닿는 대로. 어때, 멋지지?”
“그래, 너 잘났다.”
“어딜 가든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 돈 떨어지면 거기서 벌어 쓰면 되고. 꿈이 왜 꿈으로만 끝나는지 아냐? 사람들은 안 될 이유만 찾거든. 너처럼 생각이 많으면 계산기 두드리다 인생 끝나는 거야. 나처럼 단순하게 살아야 죽을 때 후회 안 한다.”
--- p.95 「김하나는 오늘도」중에서
문자를 보내온 이후로 아빠는 진짜 회사를 그만뒀다. 퇴직금에서 500만 원만 자기 몫으로 떼어놓고 나머지는 엄마 통장으로 입금시켰다. 그 돈으로 강원도 주문진항 근처에 작은 방 하나를 얻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내가 보아온 아빠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랬던 아빠가 20년 넘게 다녔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집을 나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p.103 「김하나는 오늘도」중에서
엄마는 점심에 선짓국과 내장탕을 팔고 저녁에는 곱창을 팔았으며 일요일엔 교회에 갔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에 단골손님도 제법 늘었다고 좋아했다. 지난주엔 김치며 밑반찬을 만들어 꼼꼼히 포장한 스티로폼 박스 하나를 아빠에게 보내주라며 내 방에다 툭 던져놓고 가기도 했다. 함께 있어 서로를 외롭게 했던 사람들이 떨어져 있으며 덜 외로워질 수 있는 길을 찾은 듯 보였다.
--- p.112 「김하나는 오늘도」중에서
“하나야.”
“왜?”
“언젠가, 라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아.”
마음먹었을 때, 하고 싶을 때 언제든, 그게 맞는 거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하겠다고 미뤄둔 것들은 결국 못 하고 살아왔으니까….
--- p.114 「김하나는 오늘도」중에서
23.5° 기울어져 있는 지구처럼, 저기 비스듬히 서 있는 낡은 자전거처럼, 고단한 삶을 꿋꿋하게 버티며 걸어가던 할머니의 불편한 다리처럼, 기울어져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묵묵히 밑을 받치고 서 있는 고임돌 같은 사랑도 있다. 떨어져 나온 파편이 지구를 비춰주는 달이 된 것처럼….
--- p.140 「자전거의 기울기 23.5°」중에서
빈 햇반 그릇 하나를 꺼내 생수를 담아 곁에 놔주자 목이 말랐는지 한참을 찹찹찹찹 맛있게 물을 마셨다. 그러더니 까맣고 지저분한 발에 침을 발라 잔망스럽게 얼굴을 문질러댔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을 작고 껄끄러운 혀로 싹싹 핥으며 엄마 품처럼 파고들었다. 그날 이후로, 새끼 길고양이는 편의점 앞 화단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근무하는 시간이 되면 문밖에 앉아 편의점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가끔은 유리문을 발로 싹싹 긁으며 아는 체를 했다. 나는 그 새끼 길고양이에게‘로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왠지 그 이름이 우리 둘 모두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 p.147 「로또」중에서
아내의 노랫소리가 까마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바닷가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딸아이와 조개껍질을 주우며 행복해하던 아내는, 이제 깨어진 유리 조각을 줍고 있다. 두 번째 천사가 흩뿌려놓은 슬픔의 파편 조각들이었다.
--- p.180 「리틀 몬스터」중에서
남편이 처음 버스를 몰고 거리에 나온 날이 생각났다. 두 아이와 함께 그 버스를 타고 우리는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신호를 받고 잠시 멈춰서 있거나 정류장에 들를 때마다 아이들과 나를 향해 힘껏 웃어주던 남편의 얼굴, 태희와 태주의 작은 손을 잡고서 박수처럼 마주 웃어주던 내 모습. 저녁 밥상 앞에 가족이 모여앉아 함께 밥을 먹는 그런 작고 소박한 행복마저 왜 내겐 허락되지 않았을까….
--- p.231 「드림 포에버 시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