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카리아트 시대와 불화하는 두 시인의 시가 또 다른 전제로 삼은 것은 자본의 시초축적에서 시작된 여성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급과 젠더의 교차점이다. 불안정한 노동을 매개로 더 노골화된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은 “가난의 밑바닥에 흐르는 원죄”(김사이, 「몸의 기억」)처럼 노동하는 주체에게 내면화되고 자기 자신을 비정규직 인간으로 정체화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를 기계처럼 여기고 삶을 시급으로 환산하여 분절시키며 자본의 질서에 철저히 순응하는 내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비정규직이라는 유연한 혹은 기형적인 고용형태는 시적 화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서진 신체와 영원한 가난을 사유하게 하는 탈구적 자리이기도 하다.
- 「부서진 신체들이 우리 앞에 떠오를 때 - 최세라, 김사이의 시에 대하여」(장은영) 중에서, 본문 44쪽
사실상 옷은 작동 원리가 감춰진 시대의 산물이다. 그간 패션업계는 유행이라는 말로 우리가 특정 옷을 선택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해부터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올드머니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류층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올드머니’를 상속 받은 이들에 대한 상상에 기반한 이 유행은, 부를 타고난 이들은 이를 애써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지 않으며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는 현상이다. 승계된 부에 대한 동경은 그 기원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인간의 보편적인 바람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유행은 그리 새로운 현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효한 비유로 활용되고 있는 수저론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계층적 질서의 엄연함을 재확인하게 하는 또 다른 비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올드머니룩이 타겟으로 삼은 대상이 ‘뉴머니’라는 점, 즉 자신의 세대에서부터 부를 축적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부에 대한 보편적 욕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이 얽혀있다.
- 「옷의 메커니즘: 환유 경제의 뉴블루칼라들」(송현지) 중에서, 본문 47쪽
오늘날의 노동소설에서는 전선이 형성되는 경계가 노동과 자본의 사이가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실질·허구의 분할선이다. 그 경계는 안쪽과 바깥에 놓인 주체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바꾸어 말하면 조직과 연대에 기반한 ‘초개인적 내면성’을 그 내용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분할선 안팎으로 배치된 개인들의 고투, 즉 분할선을 넘어 고립을 벗어나고 작은 연결을 만들려는 노력를 다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 담론 등으로 심리적 분할선을 고착화하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서로를 규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를 거부하는 이른바 ‘분할선 넘기’의 투쟁이 오늘날 노동소설의 내용이 된다. 그것은 주장하고 대치하고 관철하는 ‘하기’의 투쟁이 아니라 부인하고 취소하고 거절하는 ‘하지 않기’의 투쟁이다.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 자신과 서로의 마음속에서 ‘구조’가 스스로를 확인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아내는 일이다.
- 「불안정한(precarious) 마음들의 연대 ?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노동소설」(안서현) 중에서, 본문 86-87쪽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크게 체감되는 시대 감각은 불안정성이다. 소비와 유행의 트렌드가 변화하는 속도는 나날이 가속되고 있으며 개인의 정치 경제적인 계층의 이동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해지고 있다. 가령, 고용의 불안정성은 자주 노동의 유연성으로 환치되며 ‘불안정성’과 ‘유연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와 그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동일한 사안에 서로 다른 맥락을 부여함과 동시에 개별 당사자들의 입장을 정당화 하는 데에 기여한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이처럼 상호 모순되어 공존 불가능해 보이는 이중의 의미, ‘불안’과 ‘유연’이라는 단어 모두 함축한다.
- 「절망을 영속하게 하는 낙관 - 김지연 「반려빚」(2023), 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2022),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2024)」(전승민) 중에서, 본문 106쪽
때로 비평가의 일은 일종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 비평이 독자에게 좋은 작품을 선별해주는 일이라고 오인되는 경우도 잦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오해이다. 비평가의 일이란 “개별 시인들의 실재 탐구 과정의 성공을 격려하고 실패를 위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조강석, 「동시대의 시와 타자성의 변증법에 대한 모색」, 《현대문학의 연구》 19권, 374쪽) 시인과 마찬가지로 비평가에게도 세계를 탐구하고 그 진실을 직시해야 하는 책무가 주어져 있다. 시가 노래이고 그것을 담아낸 시집이 앨범이라면, 수많은 시집 속에서 옥고를 뽑아내 새롭게 해석한 비평은 그 자체로 새롭게 편곡된, 별도의 트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이 탐구하고자 하는 그 트랙리스트의 주인공은 바로 비평가 최현식이다.
- 「침묵의 심연, 틈새의 목소리 - 최현식의 비평을 정독하다」(류수연) 중에서, 본문 139쪽
요컨대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의 심화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 지속이라는 경제적 환경은 이제 더 이상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충분조건도 아니며, 상부구조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사회적 연대의 필요조건도 되지 못한다. 지금의 현실에서 ‘진보’란 자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을 통해 성취하는 자유로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변혁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힘 속에서 진보의 주체를 기획해보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면, 자본의 구획 바깥에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 떠도는 존재들을 먼저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 「떠도는, 횡단하는, 스며드는」(남승원) 중에서, 본문 156쪽
특정한 구간을 반복하는 루프적 시간은 하나의 결말을 가진 소설이라는 서사 장르 안에서 어떻게 죽음이라는 시간의 유한성을 더 리얼하게 인식하거나 감각하게 만드는가? 과거, 현재, 미래를 비직선적이고 비선형적으로 재현하는 서사적 장치는 어떻게 이야기의 질서를 구조화하여 의미를 생성하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떻게 이야기의 시간성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가? 잘 알려져 있듯 타임루프는 독자들 사이에서 일명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이라는 줄임말이 통용될 만큼 근래 판타지 장르의 웹소설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며 SF 장르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되는 장치이다. 그러나 이 글은 타임루프를 특정한 장르의 계보가 전유해온 하나의 ‘장르적 패턴’으로 간주하기보다는 특정한 구간을 되풀이하는 시간의 구조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서사적 요소’로 파악하고자 한다.
- 「이야기에는 끝이 있지만 ― 게임적 죽음과 루프적 시간의 리얼리즘」(인아영) 중에서, 본문 177-178쪽
생성형 인공지능 분야에서 매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사회가 급격하게 바뀔 것이라고 예측이 쏟아지는 시대지만, 그 영향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은 엇갈린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예측들은 적합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인공지능의 영향에 대한 예측은 대부분 특정한 분야에서 인간의 역할과 역량을 신기술이 대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그 분야에서 인간의 역량을 기계가 뛰어넘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며, 기계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인간은 자연히 ‘대체’될 것이라는 인식을 낙관론자나 비관론자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 질문을 다르게 던져야 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한다면 그렇게 대체된 인간은 어디로 가게 된다는 말인가?
- 「미래는 존재하지 않겠지만」(김요섭) 중에서, 본문 196-197쪽
그의 사려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2010년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치열한 문학 장의 논의들과 포착 가능한 변화의 양상들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이 서술하고 있듯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개념적 논의가 “다소 느슨하고 포괄적”(156쪽)이기도 하거니와, 소수자들에 대한 “시민인륜이 현저하게 결락”되어 있고 “사회적 해악으로 증가하는 혐오 발화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만한 시민 도덕이나 사회규범이 별반 마련되지 않은”(157쪽) 우리의 미흡한 현실을 고려할 때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이론화되었던 그 비판적 이론들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얼마간 무리가 있는 것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럼에도 복도훈의 비평은 탁월하다. 그의 탁월함은 현실, 작품, 이론 사이의 불가피한 틈을 일부 전제하면서도 자신이 주장하는 바로 곧게 나아가는 동시에, 무엇보다 그 과정의 논리적 충실함을 결코 잃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 「유머의 위무 ? 복도훈, 『유머의 비평』(도서출판 b, 2024)」(조대한) 중에서, 본문 216쪽
‘피부’의 경계성과 매개성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타자 혹은 세계의 표상 재현 불가능성이 강조될 때 ‘피부’를 통해 감각되는 느낌, 타자 혹은 세계와 접촉하며 상처받을 수 있다는 바로 그 느낌에 대해서는 놓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는 있다. “인간의 실감으로 세계를 감당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과 동시에 관계 맺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71쪽)라고 그는 쓴다. 나는 바로 이 ‘자명한 사실’을 우리의 신체에 육박하는 체험으로 느껴지도록 언어화하는 일이 문학과 비평이 할 수 있고 해온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평론집에서 그는 이 모두를 가르쳐주었다. 이 ‘피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참혹하거나 때로는 경이로울 것이라고 말이다.
- 「피부의 시학, 경계성에서 매개성으로 ? 박동억, 『침묵과 쟁론』(푸른사상, 2024)」(김보경) 중에서, 본문 231쪽
『호모루덴스』의 주제는 “놀이의 비합리성이 우리를 합리적인 존재 이상이 되게 한다.”로 요약된다. 근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암흑 시대에서 계몽의 시대로 바꾸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하위징아는 그 암흑 시대에서 인류 문화의 근원을 발견한다. 대표적 예로 인디언의 축제 포트래치(potlach)를 제시한다. 이 원시 축제는 두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재산을 파괴하는 ‘놀이’로 시작된다. 경쟁적으로 천막을 불태우고, 카누를 파괴한다. 상대방보다 더 많이 파괴한 쪽이 승리한다. 이해타산이 아니라 허장성세, 관대함을 뽐내는 것이다. 놀이의 요소인 미미크리와 아곤(경쟁)이 이 축제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런데, 그 부산물은 문화의 맹아가 된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서덕영) 중에서, 본문 241쪽
학교를 배경으로 다룰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학교폭력이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학교폭력의 수위가 높아지고 심각해질수록 드라마에 재현되는 학교는 폭력성과 선정성에 노출되기 쉽다. 최근 OTT 플랫폼을 중심으로 오픈되는 학원물 드라마의 주요 키워드가 ‘복수’인 이유도 무관하지 않다. 학교폭력 가해자의 합당하지 않는 처벌,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사죄나 죄책감이 사라진 현실이 남긴 것은 분노의 감정이다. 분노는 사회체제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불신으로 이어지고 ‘복수’라는 키워드와 결합하여 학교폭력 관련 대중 콘텐츠의 스토리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는 학교폭력의 피해자 또 다른 사회적 약자가 분노를 대신할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살아남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게임, 드라마 〈피라미드 게임〉」(문선영) 중에서, 본문 248-249쪽
정경윤 작가의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2013년에 처음 연재된 로맨스 웹소설로, 회사에서 벌어지는 달콤한 로맨스를 그린 이야기다. 이 웹소설이 2018년 tvN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박서준과 박민영이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는 웹소설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잘 살려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러한 사례들은 웹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웹툰, 드라마 등 다양한 미디어로 확장될 수 있는 강력한 IP(지식재산권)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확장은 웹소설의 팬층을 더욱 확대시키고, K-콘텐츠의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바야흐로 웹소설의 시대다」(최준란) 중에서, 본문 266-267쪽
미야케 쇼는 “동시대의 청춘이 가진 어떤 속성보다는 보편적인 청춘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담보 잡혀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무기력과 불안, 우울을 낳지만 새벽의 시간은 다르다. 낮과 밤이 지나 아침이 오기 직전 새벽은 그들을 자유롭게 만든다. 새벽 그들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긴밀하게 반응한다. 서로가 이어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는 인물들의 관계가 가깝다는 뜻이 아니다. 영화는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 간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다.
- 「‘청춘’을 노래하는 미야케 쇼의 영화」(김필남) 중에서, 본문 273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