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에게는 사랑의 힘 이외에 다른 힘이 없으시다. 그래서 하느님이 어떤 존재신지 우리에게 계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는 것에 동의하심으로써 사랑의 전능함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다. 올리브 동산에서 체포되셨을 때 예수님은 친히 천상 군대를 불러 병사들의 손에서 당신을 구해 내게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랬더라면, 우리에게 가짜 하느님을 보여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죽음까지 감수하시는 참된 하느님 대신 전능한 하느님을 보여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 보여 준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짓이기고 지배하는 전능함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저 위의 영원 속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할 때의,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런 힘이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분은 사랑이실 뿐이지만, 그 사랑은 전능하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누구며, 하느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신다.’(41쪽)에서
수백 수천의 짐승을 하느님을 위해 희생시켜 지구를 다 덮는다 해도, 하느님에게는 소용이 없다. 어쨌든 그것들은 모두 그분 것이니까.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것들을 모두 불사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에게 아무것도 드린 게 아니다. … 하느님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인간, 오직 인간이다. 유일하고 진정한 예배는 인간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조건 없는 ‘예.’인 것이다.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지만, 그분은 인간에게 ‘예.’ 또는 ‘아니오.’를 말할 자유, 곧 사랑하거나 사랑을 거절할 자유를 양도하셨다. 사랑에 대한 자유로운 동의만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 그것만이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구원의 신비에 대한 초보적인 설명’(130-131쪽)에서
하느님은 전능하시나, 그 전능은 사랑의 전능이다. 아무 힘이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하실 수 있다. 하느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이다. 하느님은 파괴하실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믿는다. 나를 창조하신 분은 나를 파괴하지 않으실 것이다.
--‘위험한 세 단어 지우기’(267쪽)에서
모든 죄의 특성은 파열波列을 불러일으켜 인간관계를 흔든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살면,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릇된 관계가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음행만을 생각한다면, 세상의 예쁜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는 쾌락의 대상으로만 보일 것이고,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고, 형제애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죄 중 가장 작은 것도, 타인의 양심을 들쑤시어 악을 선동한다.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나는 다른 이에게 나와 똑같이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된다. 내가 쾌락을 추구할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행동하라고 자극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죄짓고자 하는 경향이 인간의 양심 속으로 스며드는 통로가 된다.
--‘신학적 성찰들의 설명’(305쪽)에서
영적인 몸이란 자유에 도달한 인간을 표현한 말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닌 모든 것에서 죽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죽음과 대면할 수 있을 때-모든 종류의 이기주의의 죽음에 맞설 수 있을 때-자유롭다. 고요, 안락, 특권의 소유, 세상의 뻔뻔스러운 불평등에 대한 속 편한 동의 등이 이기주의의 형태들이다. 인간은 이 모든 것에서 능동적으로 죽을 때, 즉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일할 때 자유롭다.
--‘지금 우리의 몸은 완전한 몸이 아니다’(341쪽)에서
인간은 사랑함으로써만 자유롭다. 사랑 안이 아닌 다른 곳에는 어디나,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인간일 수 없게 만드는 지배의 힘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1요한 4,8), “우리를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신다.”(갈라 5,13) 사랑과 자유가 하나라는 사실, 또는 이 둘 사이의 내적 친밀성을 이해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신앙의 본질을 이해한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