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이제 그 모든 따스하고 아름답던 것들과 단절된 채, 방랑의 길거리 위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형편이다. 정처 없음의 처량함을 더해주는 것은“슬쓸한 거리”, 그것도 더 이상 기동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한 거리의“끝”이라는 말과 그 거리를 황량하게 장식해주는 거센 바람의 이미지다. 설상가상으로 시인은 그 바람 부는 거리 끝에서 하루의 끝, 곧 저녁을 맞는다. 저물녘 어둠이라는 시간적 종말의 이미지는 거리의 끝이라는 공간적 종말의 이미지와 맞물려 방랑하는 시인을 더욱 외곬의 모퉁이로 몰아세운다.…불교 전통에서도 그렇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제자들로 하여금 단호한 출가의 결행으로 방랑의 여정에 들게 했다. 그때 결별해야 할 것들은, 무엇보다 집과 집에 딸린 재산, 그리고 직계 가족들이었다. 부모자식, 형제자매들도 하나님 나라에 거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인식 가운데 종말론적 신국 운동은 주동자인 예수조차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험한 방랑의 길 위에서 진행되었다. 게다가 그를 따르던 군중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친애하던 제자들조차 그를 떠나자 겟세마네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 고독하게 남기까지 예수의 삶은 이별과 상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 시의 주인공 백석에게는 예수가 품었던 천국에의 꿈도, 미래의 뚜렷한 목표도, 또 그것을 향한 자발적 유랑에의 결기도 없었다. 그는 아마도 예수를 따랐을 군중 가운데 한 사람처럼, 식민지 백성으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잃어버린 나라에서 정주민으로서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그야말로‘어느 사이에’놓였을 뿐이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시인은 불우하다. 1장_방랑자의 고독에 깃드는 신성(백석)
세상과의 불화와 방황 속에서 위안과 희망을 탐색하는 시인에게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은 두드러진 사색의 재료로 기능하는 듯하다. 내가‘사색의 재료’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것이 흔히 이해하듯‘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든지‘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든지 하는 교리적 얼개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하느님'을 말하면서 무심히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말을 잘 할 줄 모르는 하느님”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그것도 애당초 하느님을 말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 아니라, 병원 뜰에 놓여 있는 빈 유모차 한 대의 주인이 누구일까를 궁리하는 중 뜬금없이 어눌한 하느님의 이미지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는 아마도 병원 뜰의 잔디밭 위로 맴도는 한가한 푸르름이 연상시켜준“사람들의 영혼”이란 시구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론적 맥락에서 사람의 정수, 곧 궁극의 가치로 들먹여지는 추상명사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란 면이 하느님을 떠올리게 한 동인이었으리라는 것이다.
2장_순진한 무심함, 또는 예수의 고향(김종삼)
앞서 제시한 풀에 얽힌 해석의 숲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풍경을 이룬다. 해석의 시비를 떠나 진정성의 측면에서 그 숲을 구성하는 모든 나무들은 제각각 흥미롭고 아름답다. 다만 내가 이 대목에서 시도하려는 작업은 그 숲의 나무들을 깡그리 베어 넘어뜨리기보다 그 모퉁이에 조그만 나무 한 그루를 더 심는 것이다. 이 시의 배경과 원천 자료로 정재서가 포착한 『논어』의 공자가 가능하다면, 성서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또 그리스도교 신학이 이 시의 구조적 난해함을 해소하는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오래전에 품은 적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풀과 꽃과 바람의 이미지가 구약성서에서 긴밀하게 연계되는 점에 주목한 결과다. 특히, 김수영의 시 쓰기가 그 끝 무렵에 단순히 풀과 바람의 대립뿐 아니라, 그 직전 단계에 쓰인 연작 꽃의 연속선상에서 꽃과 풀과 바람의 삼각관계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내 흥미를 끌었다. 이 또한 텍스트 상호관련성(intertextuality)의 적용과 신학적 해석의 심화라는 견지에서 충분히 모험해볼 만한 시도가 아닌가 한다.
3장_눕고, 울고, 웃는 ‘풀’의 내력(김수영)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기형도의 대표작도 아니고 유달리 뛰어난 작품도 아니다.…그러나 이 작품은 시인이 그리스도교의 목사를 다룬 유일한 시라는 별스럽지 않은 사실 이외에도, 목사인 내 가슴을 소박한 감동으로 물들이는 담담한 말들의 풍경을 조형해 보여준다. 그 풍경에 비치는 목사상은, 목사들이 잘나가는 목사를 언급하는‘세계적인 종’따위의 통속적 방식도 아니고, 교인들이 목사를 칭송하며 으레 일컫는‘성령 충만한 말씀의 사자’등속도 아니며, 세간에서 툭하면 동네북처럼 얻어맞는‘사기꾼 같은 목사놈’식의 악의적 수사도 아니다. 그런 통속적 초상을 뛰어넘은 지평에서 이 작품은 한 시절 힘들게 버텨왔던 목사의 빛과 그림자를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 목사는 특수한 개인이지만 동시에 특별히 대단할 것 없이 수수한 목사, 평범하면서도 견결한 신학적 지향을 품고 우울하게 한 세월 견디는 목사, 그러나 현실 속의 교회에서 성공하기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큰 이 땅의 하고많음 목사들의 얼굴을 대변한다.
---18장_어느‘동네’목사의 쓸쓸한 초상(기형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