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지식과 일상의 지식: 일본 정신문화의 모든 것
『유취국사』는 고대 율령국가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해온 6개의 편년체 역사서인 ‘6국사’를 주제별로 분류해 재편성한 책으로, 율령제도가 해체되고 섭관정치가 시작될 무렵 율령보다는 선례-뜽?참조해 정무를 봐야 했던 헤이안 시대 관리들이 손쉽게 선례를 찾을 수 있게 돕는 일종의 색인집이었다. 즉 『유취국사』의 편찬은 국가에서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인정한 공적인 지식을 체계화하는 사업이었다. 반면에 『왜명유취초』는 일본어의 명사를 널리 수집하여 한자어에 대응시켜 귀족들이 한자를 익히는 데 도움을 주었던 자서이다. 단순히 한자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귀족들의 일상생활에서 수집한 많은 용어들을 부문을 세워 정연하게 분류한 책이라 당시 귀족들의 생활 세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유취국사』가 국사의 세계를 통시적으로 조감하며 국가의 관점에서 엄선한 사항들을 모은 사전이었다면, 『왜명유취초』는 지식을 공간적으로 확대하여 『유취국사』의 세계에서는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생활 세계의 세밀한 부분까지 포괄한 사전이었다. 이 두 사전은 헤이안 시대 문화의 두 가지 측면을 상징하는 지적 활동의 소산이었다. 그다음에 이어진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설화집인 『고금저문집』 역시 처세술이나 생활의 지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일화나 소문, 놀이로 회자되는 이야기, 괴이한 이야기 등을 모아놓은 것으로 당시 귀족들에게는 일종의 교과서로도 쓰였을 만큼 대단히 실용적인 생활 세계의 지식이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성격의 사전이 보여주는 공적인 지식과 일상의 지식을, 오늘날 국가나 학계에서 공인받은 ‘표준적인’ 지식과 그 바깥을 구성하는 다양한 가설 및 추론의 세계와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무가문화에 대한 재평가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정치 실권을 쥐고 있었던 무사들의 문화, 즉 무가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함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고대 이래로 귀족들이 독점해온 고전에 대한 지식이나 문필 기술이 중세에 이르러 무사들 사이에도 확산되었지만, 무사들은 귀족들이 이룩한 역사와 문화의 틀을 파악할 수 없었고 유서, 즉 백과사전적인 책들의 장대한 체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중세에 만들어진 많은 교과서는 체계보다는 실용을 앞세워 편찬되었다. 실제로 중세 후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막부 체제하에서 역사와 인생을 알기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읽었던 책은 장편 역사 이야기인 『태평기』였다. 또한 저자는 도쿠가와 막부 후기에 무가문화를 종합한 유서인 『무가명목초』와 고대, 중세에 귀족들이 남긴 『유취국사』 『왜명유취초』 『고금저문집』 등을 비교하며 전자는 후자의 일부를 상세하게 한 것에 불과할 뿐 보편적인 지식의 체계적 확산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가명목초』는 극도로 상세한 지식을 집대성했다고는 하지만 그 관심이 주로 무사들의 전투나 생활, 의례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저자는 귀족에서 무가로 정치 실권이 옮겨감에 따라 당연히 귀족문화에서 무가문화의 시대로 넘어간다는 교과서적인 문화사 인식을 비판하며, 시대 구분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성과 그 전제로서 ‘무가문화’라고 여겨온 것의 내실을 검증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배워야 산다!” 밀려드는 서구의 신지식에 대한 매혹과 공포
일본 사전의 역사를 이루는 큰 줄기 가운데 하나는 쇄국정책 시기에도 유일하게 문을 열었던 나가사키의 네덜란드를 비롯해, 군함을 타고 와 통상을 요구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밀려드는 서구 세력과 그들이 들여온 새로운 문물에 대응하여 나타난 다양한 종류의 사전들이다. 18세기 후반 일본의 난학자들은 프랑스인 성직자 노엘 쇼멜이 당시 유럽의 생활 지식을 모아 펴낸 실용 백과사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입수하여 열독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 책은 막부의 주도로 번역이 시작되었다. 『후생신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책은 당시의 대표적인 난학자들이 2대, 3대에 걸쳐 번역을 이어갔는데, 유럽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번역어도 안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필요한 항목을 골라 원고를 완성해가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한편, 일본의 장래에 대한 위기감으로 열심히 네덜란드어를 익혔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직후 네덜란드어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듯이, 막부 말기의 일본인들은 외국어 학습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루마화해』 『삼어편람』 『오방통어』 『앙게리아어림대성』 등 당시 잇달아 출간된 수많은 외국어 사서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지식 앞에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던 근대 일본인들의 복잡한 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통에 기대어 미래를 구상하다
외세의 위협과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위기감을 느낀 메이지 신정부는 한편으로 서양의 백과사전들을 부지런히 번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위한 유서 편찬에 열을 올렸다.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것에 의지하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안전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여러 번으로 나뉜 체제밖에 몰랐던 당시 일본인들이 통일국가를 생각할 때는 고대 율령국가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이미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전통에 대한 관심과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신대 이래 일본의 역사와 문화의 모든 것을 파악하려 했던 『고사유원』이었다. 1879년에 시작된 『고사유원』의 편찬은 사업 중단과 재개, 기한 연장을 거듭하다가 1913년에 전 1000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이처럼 고대 이래로 발전해온 일본의 사전 편찬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 백과사전의 번역과 전통문화의 집대성이라는 두 갈래 길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근대적 백과사전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일본백과대사전』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 20세기 초반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참여해 완성해낸 『일본백과대사전』은 메이지 문화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성과였고,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 하에서 국력의 융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자국어로 된 근대적 백과사전을 갖게 되었고, 이후 잇달아 출간된 충실한 내용의 사전들은 일본의 출판문화, 나아가 지식문화 전반의 튼튼한 밑바탕이 되었다.
당대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사전 편찬자들의 열정과 고투
최근 화제가 되었던 일본소설 『배를 엮다』와 그것을 영화화한 작품 〈행복한 사전〉에는 사전 편찬이 말과 지식의 망망대해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지루함과 압박감을 견뎌야 하는 일인지가 잘 드러나 있다. “사전 만들기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과 사고의 지치지 않는 반복입니다”라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말처럼, 『사전, 시대를 엮다』에 등장하는 사전 편찬자들은 자신을 지원해줄 세력의 부침^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단히 지식을 모으고 편집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가야 했다. 이 책에는 정권의 변화, 외세의 위협 등 외적인 어려움과 신분상의 한계나 신체적 장애, 서구 지식과의 문화적 간극 등 내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며 오랜 시간 우직하게 사전을 만들어간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열정과 고투가 담겨 있다.
일례로, 1806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무가문화의 종합적인 기록인 『무가명목초』를 편찬하라는 명을 받은 하나와 호키이치는 일곱 살에 시력을 잃은 맹인이었다. 그는 맹인으로서 안마, 음곡, 침술과 같은 평범한 직업을 가지려 했으나, 학문에 대한 뜻을 굽히지 못하고 국학의 대가 가모 마부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걸출한 국학자로 성장했다. 이후 막부의 지원으로 화학강담소를 설립해 일본의 고전을 망라한 일대 총서인 『군서유종』을 완간했고, 이어서 『무가명목초』의 편찬을 맡게 되었다. 당시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던 호키이치는 건강의 악화로 그 일을 완수할 수 없었지만, 그가 구상한 총목록과 범례를 바탕으로 한 『무가명목초』는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60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밖에도 현실 세계에 대한 폭넓은 관심으로 에도 시대의 구체적인 생활상과 자연에 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총체적으로 담은 『화한삼재도회』를 편찬한 의사 데라시마 료안, 화약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네덜란드어로 된 책을 주문했는데 프랑스어 번역본이 도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배우고 결국 『삼어편람』 『불어명요』와 같은 어학 사서를 편찬하게 된 난학자 무라카미 히데토시, 사업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규모가 확장되어 출판사가 도산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일본백과대사전』의 집필자들과 같이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사전 하나하나를 완성해온 편찬자들의 고투와 사연은 장구한 지식의 역사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