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5월초, 한 페이지의 기획서에 기꺼이 동감하며 집필을 시작한 지 꼬박 2년이 지났습니다. 선생님 정말 힘드셨죠. 이 책 집필에는 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선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전혀 새로운 개념의, 대안의 한자 교과서를 집필하자고 의기투합해서 작업을 시작했지만, 출간에 이르기까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산 넘어 산의 고초를 겪었습니다. 막상 책이 출간된다고 하니 시원하고 통쾌합니다. 하지만 벌써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만 자꾸 눈에 띱니다. 그래도 우리 네 사람이 힘을 모아서, 지금까지 나온 수백 종의 한자 관련 책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한자 교과서를 완성한 것을 아주 기쁘고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모두들에게 고맙고 감사합니다.
- 다시 한번 여쭈어 봅니다. 한자는 왜 배워야하나요? 우리에게 한자는 무엇인가요?
민족주의 조류에 떠밀려 20세기 유물로 전락할 뻔했던 한자가 21세기 정보화 시대, 문화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의 한자 학습열은 벌써 몇 해 전부터 시작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지난해에 한국경제 5단체에서 신입사원 채용시에 한자시험을 볼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밖에 한자 검정시험 자격증 소지자에게 가산점을 준다는 기업체 발표가 잇따르면서, 대학생들 사이에도 한자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에 시중에도 우후죽순처럼 많은 한자 교재들이 앞 다투어 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한자와 관련된 책은 단순히 글자 풀이에 그치거나, 흥미 위주로 글자를 설명하는데 그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한자를 배워야 하는 까닭은 단순히 취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왜 기업체에서 한자 시험을 보려 하는가에 대한 이유와도 연관된 것입니다. 언어는 문화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합니다. 그간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에 우뚝 섬으로써 한자는 냉소적 시선을 받아왔고 외국어인 영어는 과분한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 분야에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대외 교역에서 한자 사용의 기회가 늘어나리라는 점을 각 기업체에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요구와는 별개로 한자를 배워야만 하는 근원적 이유가 있습니다. 외국어인 한문과 달리 한자어는 우리말입니다. 따라서 한자 속에는 우리 문화와 선인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나를 알고 우리를 알아, 남과 상대할 수 있으려면 문화 역량을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자 공부는 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자 아주 유용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 생각 없이 매일 사용하는 말 속에는 생각지도 못한 생활의 지혜와 문화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한자를 모른다고 해도 큰 불편은 없지만 한자를 제대로 알고서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신선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청소년이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또 한자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어휘력이 몰라보게 향상되고, 사물의 의미나 말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과서에 나오는 수많은 용어들이나 신문 잡지에 보이는 생소한 표현들도 막상 한자의 개념으로 익히면 이해가 쉽고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게 됩니다.
- 최근 한자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최근 한자 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천자문> 출판입니다. 제가 듣기로 이 이름을 달고 유통되는 책이 140여종에 이른다고 합니다. 관심이 높은 만큼 문제점 또한 많을 텐데요. 선생님께서 이 책을 쓰신 동기와 어떤 근원적인 문제의식은 무엇인가요?
: <천자문>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됩니다.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르 황으로 읽었지요. 다산 정약용 선생은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천자문>을 절대로 읽혀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천지를 말하다가 갑자기 색채로 넘어가고, 다시 우주를 말하다가 느닷없이 크기로 넘어가는 등 마구 뒤섞여 있어, 개념이 혼란스럽고 계통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막상 천지현황을 읽으면서도 ‘감을 현 누르 황’이라 읽고, 감을 현(玄)을 칭칭 감는다는 뜻인 줄 알고, 누르 황(黃)은 꽉 누른다는 뜻으로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현행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한자 교육 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고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외워보았자 무슨 말인지도 모를 글을 무조건 외게 하는 것은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자에 정을 떼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데, 며칠 전 한자 시험을 본다기에 문제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선의인(鮮矣仁)”이니,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이니 하는 <논어>의 구절들을 주욱 늘어 놓았는데, 번역이 엉망인 것은 물론 시험지 두 장에 오자가 무려 10여 개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성의하고 대책 없이 한자를 학습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대부분의 학교에서 정해진 단계별 학습이나 프로그램도 없이 그저 낱글자를 익히고 베껴 쓰게 하는 일방적 주입식 한자 학습만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한자 교육의 당위성과도 정면 배치될 뿐 아니라, 학생들의 사고력 계발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자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배우려드는 현상은 기쁜 일이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을 들여다보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참 큰일입니다.
-아울러 많은 사람들이 한자는 꼭 알아야 하고, 꼭 배워야겠다고는 하면서도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문 교육계에서의 고민도 많을 거구요. 특별하게 이 책에서 시도한 방법론을 제시한다면?
: 앞서 다산 선생의 말씀처럼 그냥 낱낱의 글자를 무턱대고 외우기만 하는 것은 학습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계열화되고 계통화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학습법이라고나 할까요? 하나를 미루어 다른 하나를 깨치고, 둘을 알아 열을 깨우치는 생산적인 학습법의 제시가 한자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도 모를 경전 구절을 무조건 외게 하거나 해서는 도무지 한자공부가 지긋지긋하기만 할 겁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자주 쓰는 낱말들의 의미를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의미와 함께 전달하고, 다른 비슷한 낱말로 확산하는 방식으로 학습 방식을 전환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늘상 쓰면서도 막상 뜻 모르고 쓰던 말의 의미를 하나하나 깨쳐가는 동안 한자에 자연스레 흥미를 느끼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식과 교양이 풍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자 공부가 아주 즐거워집니다.
-이 책에서는 금석문이나 전서 등 상형자와 함께 옛 그림이나 글씨, 그리고 풍경을 담은 도판을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한자와 문화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할 것 같은데요. 어떤 도움이 될까요?
: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 가운데 하나가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풍부한 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명만으로는 알 수 없거나 불분명한 것도, 그림과 함께 보면 이해하기 쉬울 뿐 아니라 또렷이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내용과 관련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으면 함께 도판을 실어 독자의 이해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도판은 책 읽기를 즐겁게 해주고, 의미를 각인시켜 주는 데 도움을 줍니다. 또 한자의 다양한 글꼴을 이해하거나, 글자의 의미를 기억하는데도 본문에 제시된 도판 자료들이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 책은 한자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서부터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성인에서 청소년까지 수준별 연령별로 다양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처음에는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정도를 대상 독자층으로 설정하고 집필하였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중,고등학생들에게도 흥미롭겠지만, 오히려 학부모나 성인층에게 더 즐겁게 읽힐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그동안 모르고 쓰던 말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고, 청소년들은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한자에 아주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특별히 부담을 갖지 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대로 읽으면서 그 의미를 새기고 생활에 응용해 본다면, 한자와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글자를 익히고 고사성어를 배우고 문장을 익힌다면, 학습 효과가 훨씬 커질 것입니다.
-머리말에서 선생님께서는 이 책이 단순히 상식을 넘어 한자 속에 담긴 선인들의 문화와 바른 삶의 자세를 음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삶에서 어떤 힘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서문에서도 잠깐 밝혔듯이 문화란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생활양식은 언어 속에 스며들고, 언어와 생각이 모여 문화를 이룹니다. 고급한 문화일수록 어휘의 수가 많아지고, 이야기가 풍부합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넘쳐납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잊었거나 알려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단순히 한자를 몇 자 더 알고 모르는 것은 현대 생활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자를 모르고도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한자를 배우는 것은, 한자가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넘어 삶의 바른 길과 닿아 있고, 선인들의 지혜와 연결되며, 우리 문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자는 일종의 방편이자 도구인 셈이지요. 결코 한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자를 배우면 생각이 깊어지고, 어휘력 표현력이 향상되며, 세계를 이해하는 힘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삶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할 말씀은?
: 한자는 우리 문화, 나아가 동양문화를 읽는 코드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순히 취직 시험에 도움이 되거나, 시험 공부에 보탬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서양 속담에 ‘사람이 빵만을 추구하면 빵도 얻지 못하고, 빵 이상의 것을 추구하면 빵은 저절로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한자 몇 글자를 더 쓸 줄 알고 모르고, 성적에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한자를 즐겁게 익히고 공부해서 내 것으로 만들게 되면, 그것이 내게 주는 효용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그 이상의 보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