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찾아온 방문객들은 다양했다. 스리 라마나의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의 힘에 매혹된 이도 있었고,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종교적인 가르침을 해석하는 그의 권위에 이끌린 사람도 있었다. 또 자신이 겪는 문제를 상담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이유로 찾아왔든 스리 라마나를 대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소탈함과 겸손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누구나 드나드는 공용 공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하루 24시간 내내 방문자들이 접견할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사유물이라고는 몸의 주요 부위를 겨우 가릴 수 있는 천 조각과 물주전자 그리고 지팡이가 전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했지만, 그는 자신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아시람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17쪽, 머리말
『나』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안다는 행위는 없다. 안다는 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나』를 깨달은 상태는 무언가를 새롭게 얻거나 저 멀리 보이는 어떤 목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있었던 그대로, 또한 항상 있는 그대로 그냥 존재하는 상태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여기는 태도를 버리기만 하면 된다. 우리 모두는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가 늘 하던 이런 행위를 그치기만 하면, 참나가 곧 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저 ‘나로 존재하라’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당신은 그토록 자명한 『나』를 찾으려고 애썼던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그 단계에 이르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분리에서 벗어난다. 그때는 보는 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보는 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만 남는다.
30쪽, 『나』의 본성
그는 ‘『나』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실체’라는 입장을 견지했으므로, ‘나라는 생각’은 실재하지 않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나라는 생각’은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나라는 생각’이 따라서 일어나 ‘나는 생각하다’,‘나는 믿는다’,‘나는 원한다’,‘나는 행한다’라는 식으로 주인 행세를 한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은 나와 동일시할 대상이 있어야 존재하며, 동일시할 대상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생각’은 없다. 그런데도 ‘나라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마치 실체처럼 보이는 것은,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는 행위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근원을 추적해보면, ‘나’라는 존재가 육체에 국한되어 있다는 착각이 그 뿌리를 이룬다. 즉 내가 육체를 소유?점유하고 있거나, 같은 공간에 한정되어 육체의 틀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육체다’라는 생각 때문에 이후의 모든 그릇된 동일시가 이루어지기에, 이 생각을 소멸시키는 것이 자기탐구의 주목표이다. 89~90쪽, 자기탐구-이론
그는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나(나는 원한다, 나는 움직인다 등)’를 반복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되지만, 이런 수행은 예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곤 했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나’를 반복적으로 되뇌는 방법은 지각하는 주체와 지각하는 대상이 이원적二元的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원성이 존재하는 한 ‘나’라는 생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라는 생각’은 육체적?정신적으로 ‘인지하는 대상’이 소멸되어야 마침내 사라진다. ‘나’를 알아차리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 『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대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자기탐구의 궁극적 차원이며, 이것은 다음 장에서 좀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91쪽, 자기탐구-이론
초심자는 자기탐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마음은 오로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함으로써만 다스릴 수 있다. 불을 지피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마지막에는 자신도 불길에 던져지는 화장터의 막대기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소멸시킨 뒤에, 마지막에는 그 자체도 소멸된다.
만약 딴 생각이 일어나거든, 그 생각의 뿌리를 파고들어서 캐내려고 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하고 자문해보라.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고 해도 괘념치 마라.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에게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마음은 그 근원(참나)으로 돌아가고, 일어났던 생각들도 사라질 것이다. 또한 이런 수행을 거듭하면 마음이 그 근원에 머무는 힘이 커질 것이다.
108쪽, 자기탐구-수행
스리 라마나가 권하는 자기탐구는 흔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아드바이타 베단타 학파의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그 답이 “나는 브라만이다”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해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할 여지도 없이 “나는 브라만이다”를 마음속으로 되풀이해서 되뇌는 것을 해법으로 삼는다.
하지만 스리 라마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거나 답을 반복해서 외는데 마음을 온통 빼앗기는 한, 마음을 그 근원으로 가라앉혀 소멸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그와 같은 수행법을 비판했다. 두 가지 수행법 모두 자기탐구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스리 라마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의도는 마음을 분석하여 그 본성에 대한 어떤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이를 진언으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 질문은 생각이나 인식의 대상으로부터, 생각하고 인식하는 자에게로 ‘주위’를 되돌리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스리 라마나의 견해에 따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마음으로 찾을 수도 없고, 마음에서 찾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해답은 ‘마음이 사라진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30쪽, 자기탐구-그릇된 견해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자기탐구를 시작해, ‘내’가 아닌 육체를 부정하고, ‘내’가 아닌 호흡을 부정하는 식으로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지성知性으로는 거기까지밖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수행법은 지적이다. 모든 경전에 적혀 있는 수행법들 역시 사실상 수행자들이 진리를 알 수 있게 인도하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진리란 직접적으로 콕 집어서 가리킬 수는 없다. 그래서 당신처럼 지적으로 수행하는 방법도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나 아닌 것’을 없애는 자가 ‘나’까지 없앨 수는 없다는 점을 잘 관찰하라.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거나 “나는 저것이다”라고 할 때는 반드시 ‘나’가 있어야 한다. 이 ‘나’가 바로 에고 혹은 ‘나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 다른 모든 생각도 뒤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나라는 생각’이 뿌리 생각‘이다. 뿌리를 뽑으면 거기에 딸린 온갖 생각들이 함께 우르르 뽑힌다. 그러므로 뿌리인 ’나‘를 찾아서,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 근원을 찾으면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순수한 『나』만이 오롯이 남을 것이다. 133~134쪽, 자기탐구-그릇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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