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5/1 이상구(flypaper@yes24.com)
"그런 게 어디 있어? 그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지." 나른하고도 평온한 오후, 루 리드가 부르는 「퍼펙트 데이」의 가사가 어울려야 할 한적한 한 때. 선문답에 파묻혀 시간은 흐른다. "존경하는 인물이 있어?", "그런 게 있다면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지 않아?" 사치스러운 대화들. 몇 번인가 체 게바라를 얘기한다. 그냥 체 게바라를. 우연의 음악인 것처럼, 그 때 맞춤하고 그의 평전이 출간된다.
표지가 시원한 책. 두꺼워서 한 손에 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익숙하지 않기에 더욱 더 욕심이 나는 문고판. 새 운동화를 신고 스타트 라인에 선 느낌이랄까? 이래저래 멋진 표지의 새 책을 만나면 긴장이 된다. 애들은 말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소소한 법칙. '기대는 가능한 적게 가질 것!'. 하지만 역시 잘 되지 않는다. 선험적인 한계에 묶이고 마는 우리네 삶. 표지가 갖는 흡인력에 비해 내용은 다소 메마른 감이 있다. 단숨에 읽었다고 말하긴 좀 어렵다.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문체도 무척 건조하고,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데 반해 내적 연관성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캐릭터도 그다지 생동감이 느껴지는 편은 아니다. 소설이 아닌데, 라고 하면 더 이상 할말은 없다. 그러나 평전의 캐릭터들이 더 다이내믹해질 수도 있는, 아니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는 없을까? 요컨대 집중력을 돋굴 무언가는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논평이 극도로 절제된 이 책의 미덕은, 독자들에게 체 게바라의 삶과 영혼의 행적을 상상하는 수고로움을 지워주는 데 있다. 내러티브의 역할을 자처하며 행간에 개입할 필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여하튼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연대기를 좇아 쉬엄쉬엄 걷다 지치면 그만이다.
아르헨티나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어렸을 적부터 심한 천식으로 고생을 했다. 그래서 체 게바라의 식구들은 체의 천식이 악화되지 않을 만한 곳을 찾아 늘 이사를 다녀야 했다. 심한 천식 발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죽음은 그렇게 늘 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식이 없었다면, 어쩌면 다르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 하루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사는 한편 역시 적극적으로 체념을 배워야 하는 삶. 죽음은 항상 체의 자유로운 영혼과 교감하고 있었다.
죽은 모습이 끔찍하게도 예수를 닮았었다는 체 게바라는 평생 오히려 돈키호테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는 의사 자격 시험을 앞두고 사촌형인 알베르토와 중남미 대륙을 여러 달 여행한다. 아마도 그 여행이 체에게 남미대륙의 혁명에 대한 예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온 체는 이제 아르헨티나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혁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곳이든 돈키호테가 되어 떠돌아다니게 된다. 동행할 산쵸는 없고, 로시난테의 역할은 천식약이 대신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먼길이지만 아무런 망설임 없이 힘든 노정을 자청한다.
새삼스럽지만 프랑스 68혁명은 67년 10월 9일 전세계에 긴급 타전된 한 줄의 뉴스가 기폭제가 된 것이다. "게바라 죽다". 68혁명의 전과정을 통틀어 모든 혁명의 전위들을 들뜨게 한 그 이름은 이웃 나라 체코에 '프라하의 봄'으로 파열된다. 소설가가 일단 자신의 작품을 손에서 놓아 보내면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는 법. 말을 아껴야 하는 것은 그네들의 숙명이고, 독자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체 게바라는 죽는 순간 하나의 기념비적인 텍스트가 되어 죽음이라는 새 노새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도착한 68혁명이라는 시공간은 이제 체 게바라적인 체념의 아우라로 남아 있다.
권태는 땀을 요구했건만... 역사상 세계가 진정한 의미로 가장 세계적이었던 그 시기에 우리는 그 열기를 등지고 외로 서 있었다. 참 특이하다고 밖에 말하지 못할 연구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축에 속한 내가 그렇다는 괜한 자괴감일 뿐이겠지만, 지금 현재 이곳에서 이렇게까지 체 게바라를 향유할 수 있다는 건 한 동시대성을 놓쳐버린 탓에 오히려 운 좋게도 그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워진 이유는 아닐지. 꿈과 희망을 놓쳐 버린 그네들에게 그 한 순간은 더 이상 과거의 소금기 어린 땀일 수 없다. 우리는 아이러니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권력을 잡은 혁명가가 몇 있다. 레닌이 그랬고 마오가 그랬고, 동부 유럽의 몇몇 사람들이 그랬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혁명가였던 사람은 없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 국립은행의 행장 사무실을 택하는 대신 볼리비아 아마존 정글 속 게릴라로 되돌아갔다. '카리브 해의 위기가 야기한 슬프고도 빛나는 시간들'을 지속시키기 위해.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맞는 말이다. 자신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오롯이 견뎌내야 다른 사람의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죽을 때도 함께 할 신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돈키호테적인 신념. 극단적으로, 처연할 정도로 단순한. 게바라의 게릴라 동료였던 벤 벨라는 이렇게 말한다.
"체는 혁명운동을 한 차원 높였습니다. 강하고 신선한 바람 같았지요. 그에게는 뭔가 다른 어떤 것, 완전한 단순함이 있었습니다. 그건 의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인간에게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밥그릇을 채워주진 않겠지만, 또 다른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신념은 필요하다. 팔랑 팔랑 가볍게, 날아갈 듯이 부유하며 살려고 해도 그걸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부당한 것이라고는 생각해도, 그것이 불가능한 꿈을 내용으로 하고 있을수록 더욱 더 그렇다. 자의식은 강하지만 의지가 박약하다면 심플한 인생을 꿈꿀 수 없다.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남이 바꿔주기만을 바라는 사람들, 나의 비루한 예민함에 물릴 때에, 그런 때에 평전을 읽는다. 체 게바라를 읽기 시작할 때도 그런 때였다. 어떤 강력한 리얼리티 같은 것이 필요했다. 가능한 것은 불확실한 형태로 나타나며, 불가능한 것은 늘 확실한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거기에서 신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며 위안 받고 또한 고무 받아야만 했다.
지금 저자를 횡행하는 체 게바라 '현상'이, 가방 속에 담겨져 남아메리카 밀림 어딘가에 묻혀 있을 그의 시신을 꺼내어 척박한 상업주의의 칼날로 다시 그를 난자하는 것이라 해도 늘 있어왔던 일, 담담하게 앉아 있기로 한다. 굶어서 가벼워질 수 있다는데, 몇 끼 식사 정도는 건너뛸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의지박약한, 살아 남은 자를 위한 슬픔의 몫일 뿐이니까.
그저 '오랫동안 전설에 가려져 있던 인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선구자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다소 의식적으로 불려나와 이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악적인 제스쳐가 되는 것일까? 그보다 예전에 보았던 「하이프」라는 시애틀 그런지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야기. 기타리스트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소파에 널부러져 하던 말. "펑크는 영원할 거예요. 애들(KIDS)이 있는 한은." 체 게바라 '대박'에 대해 한가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려보다가 문득 생각난 얘기다.
"그저 일상의 균형을 단단히 하기 위해 자신을 보완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체는 절대로 자신을 보완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분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움과 강함은 잘 섞여서 너그러움이라는 하나의 돌이 되었다." 아찔한 숭배성 발언이지만, 이런 구절을 읽으면 이기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철든 생각도 하게 되고, 뭐 그렇다는 얘기다.
체 게바라의 신념과 체념을 가슴에 묻고 뚜벅뚜벅 걸어가야겠다는 의지가 솟았다면 낯뜨거운 고백이 될까? 하지만 성숙한 사람일수록 삶 속에서 몸으로 말을 한다. 어렵겠지만 현실에 지배당하지 않고자 한다면 그런 순수한 스텝을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