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상술한 소크라테스의 구호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구호를 따라 인간의 마음속으로 되돌아갔다면 “SZ”에서 나타난 하이데거의 주지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현상학을 문제시하고 극복하려 했을 것이다. 평생 그렇게 하려고 진력한 하이데거도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구호를 따라 인간의 마음속으로 되돌아가서 그 속에서 모든 부류의 진리들과 그들이 궁극적으로 파생하는 원초적인 진리 그 자체를 발견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권장한 길이 진리와 진리 그 자체인 존재 또는 “비은폐성”(aletheia)에 이르는 길이며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점을 하이데거는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 이상으로 더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마음 내부로 하강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기독교적인 초월신관을 그 무엇보다 굳게 믿고 있었고, 진리를 인간의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외부의 곳곳에서, 온 우주에서, 그리고 창조 이전의 신의 마음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마음속 깊은 데로 하강해서, 아니 그의 마음속 가장 높은 곳으로 상승해서 하나의 영원불변한 빛으로, 진리 그 자체로 보고 체험한 신은 사실상 공간관계를 완전히 초월해 있는, 따라서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한다고도, 그 밖에 “외재”한다고도 볼 수 있는 절대자로 이해한 반면 하이데거는 자신이 원초적인 진리와 동일시하고 있는 존재는 다른 그 어디서가 아닌 인간 현존재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1부 제1장_ 존재 문제 제기의 필요성(I): 긍정적 동기」중에서
하이데거는 이성의 층, “의식 일반”(Bewußtsein Uerhaupt, 칸트)의 층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후설, 그리고 모든 주지주의자들과 주관주의자들과 작별하고 자신의 특수한 길, 이들의 “표상적 사유”의 길과 전혀 판이한 “근본적 사유”의 길을 따라 그 근저에 깔려 있는 깊은 마음의 층?즉 칸트와 후설의 “순수 의식” 혹은 “선험적 주체성”과 판이한 “인간 속의 현존재”의 층?까지 하강하게 되었다. 그가 “순수 의식”의 층에서 후설과 결별하고 그를 뒤로 두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 계속 하강하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와는 완전히 결별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거기서부터 서로 다른 길을 따라 나아갔으나 유사한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갔기 때문이다.
---「제1장_ 존재 문제 제기의 필요성(I): 긍정적 동기」중에서
존재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문제는 고사하고 세상의 그 어떤 다른 문제도 거론할 수 없으며,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문제나 세상의 그 어떤 다른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존재의 문제를 그릇된 방법과 방향으로 거론하고 취급하는 데서 그 의미를 곡해하면 인간의 정체성과 세상만사의 의미와 가치도 덩달아 곡해하게 된다. 역으로 존재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면 그 빛으로 인간과 인간 외의 여타 존재자들의 존재의 의미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된다. 그만큼 존재의 문제는 우리에게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양 사상가들은 지금까지 존재의 의미를 완전히 곡해해왔다고 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은 일률적으로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하고 존재의 미명 아래 존재자 일반의 본질을 연구해왔다.…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본향을 상실한 채 밝은 존재의 빛 속이 아닌 존재자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현대 이론과학과 응용기술이 가져다주는 물질적인 혜택으로 현대인들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과 부를 누리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사실에 눈이 가려 자신들이 정신적으로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그보다 더 급박하고 중대한 과제는 없다.
---「제2장 존재 문제 제기의 필요성(II): 소극적 동기」중에서
현존재는 존재의 현주이며 존재와의 관계이므로 여기서 존재와 관련해서 개진된 것을 현존재 자신과 관련해서도 주장할 수 있다. “현존재가 비록 존재적으로는 [자신에게] 가까우며 가장 가까운 자일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각각 현존재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존재론적으로 그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지만 우리의 근거가 존재이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알고 너무나 잘 알면서도 너무나 모르기도 한다. 현존재의 존재 깊은 근저에서는 처음부터 이미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의 현주와 실존이기에 현존재는 자기 삶의 최종 목표인 이상적인 자신과 존재 자체에 항상 이미 도달해 있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지적·존재론적으로 그것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주위 사물들과 사람들의 “세계”에 빠져들어 가 있고 존재의 의미, 존재의 진리를 뜻하는 세계와 세계내존으로서의 진정한 자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존재의 빛으로 빛나는 삶을 살아가기보다 어두운 세상에 몰입되고 도취되어 빛 없고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정한 언어 없이, “언어 공백” 속에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의미 없는 인간의 말들, 많은 요란한 “요설”을 늘어놓으며 “언어 공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타향에서 돼지 사료로 연명하는 성경 속 “탕자”의 방랑 행각과도 같은 비본래적인 삶을 청산하고 자신의 “본향”(Heimat)인 “존재의 인접성”(die Nahe des Seins)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제2부 제2장 본론」중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존재와의 관계이며 세계내존이라는 점을 자신의 “타락성”으로 말미암아 주로 망각하고 살아가며, 마치 존재의 빛과는 전혀 무관한, 순수한 “존재자와의 관계”인 것과 같이 자신을 크게 곡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실존성을 처음부터 “동일하게 원초적으로”(gleichursprunglich) 특징짓는 “상태성”은 그로 하여금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 가운데서는 불분명하게나마 항상 그러나 때로는 홀연히 확연하게 실존과 외존으로서의 자신의 본성과 본령, 자신의 특권과 책무에 대해서,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자신이 피투되어 본질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존재 또는 세계의 실재성과 그 엄청난 위엄과 위력을 통감하게 한다. 특히 그가 그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실존적 “불안”에 휩싸일 때 그는 이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 자체에 대해서 단순한 이론적인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고 뜨거운, 전인적이며 실존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제2장 본론」중에서
하이데거가 위와 같은 최대의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촉구하는 바는 그들이 급진적인 방향 전환을 감행하고 완전히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성 중심과 존재자 위주의 표상적·산정적·사유, 개념적·과학적 사유의 전통에서 “하차”(Absprung)하고 존재 본위의 근본적·원초적 사유, 회상적·전향적 사유를 통해 존재의 차원, 존재의 빛의 사건의 차원으로 비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인들도 본질상, 즉 실존 구조상으로는 존재와의 관계이며 실존과 외존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존재에서 완전히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만사를 존재의 빛 없이 바라보며 현존재의 안목이 아닌 이성의 안목으로, 그것도 과학 이성과 “기술 이성”의 안목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들 모두를 곡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사물의 정체와 의미에 대한 이러한 곡해를 풀어야 한다. 그들은 이제 존재의 빛 속으로, 존재의 “인접성” 혹은 존재라는 “인접성”으로 되돌아와야만 할 때가 되었다. 존재자 위주의 비본래적인 사유와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존재의 빛의 차원으로 되돌아가서(einkehren) 그와 진정한 내적인 관계(das Zusammengehoren)를 맺어야만 할 때가 되었다.
---「제3부 제1장 하이데거의 주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