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는 하나님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진술을 하고는 거기에 색을 칠하고 내용을 더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가 책에서 읽은 내용, 소중하게 들은 설교, 함께 나눈 대화, 그리고 우리의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인 기독교 역사와 경험의 보고가 우리의 통찰을 보완해 준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 몇 마디 안 되는 단어가 이 탐험의 시발점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의 토대이자 영혼의 닻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모호하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을 말하는 것인가?”
_서문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온전히 다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증명하고 정의하려고 시도하지만, 결국 그렇게 정의하거나 증명한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와는 별 관계가 없음을 발견할 뿐이다.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탐험하는 것은 매우 즐거울 수 있으나,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궁극적인 찬사를 돌리게 된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어떤 분인지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우리에게 다가오십시오….”
_1. 어떤 하나님을 말하는가 중에서
“성경은 인격적 관계의 맥락에서만 비로소 이해가 되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 믿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친구이며, 일이 잘못되었을 때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 동료다.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했고 우리가 온전히 인생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는 부모를 신뢰하듯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신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지시받는 일인 양,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약속하기 위해 말씀하신다. 우리가 홀로 있거나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키기 위해 말씀하신다. 성실한 목자처럼,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도와주시고, 길을 가는 우리를 격려하시고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에 도달하게 해주신다.”
_2. 인격적이신 하나님: 사랑과 신실함 중에서
“세상은 기쁨과 슬픔이 무작위로 던져진 채 뒤섞인 무의미한 곳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이란 비록 슬픔과 비극의 흔적들이 있지만 의미 있고 즐겁다는 것이다. ‘우울은 순진한 간주곡, 연약하고 일시적인 사고의 틀이어야 하며, 영혼의 항구적 박동은 찬양이어야 한다.’ 체스터턴이 깨달은 것처럼 이 복잡한 세상은 지나가며, 더 이상 슬픔과 비극, 고통과 눈물이 없는 세상이 들어선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앞으로 올 것을 기대한다.”
_3. 전능하신 하나님: 권능, 긍휼, 그리고 고난 중에서
“좋은 신학은 우리가 선입견과 오해로 하나님을 얼마나 제한하는지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시야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실재를 우리가 머리와 마음으로 다시 이해하게 도와준다. 결코 공식이나 이론으로 제한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축소되고 길들여진 반쪽짜리 진실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삼위일체가 ‘비합리적’이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실재를 제한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축소하거나,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하나님을 바꾸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갇힐 수 없고, 우리가 생각 속에 만들어 놓은 이론과 합리의 틀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갑자기 산산조각이 난다 해도 놀랄 이유가 없다. 결국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사고가 하나님에게 적응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_5. 삼위일체: 신비인가 혼란인가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