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편의 이야기 하나의 우주 안에 흩어져 있는 네 개의 성좌
독일인으로 태어났지만 독일인이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발적 망명자’, 그러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치밀한 독일어로 불안과 공포, 현기증에 휩싸인 독일문학의 계보를 잇는 작가 W. 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은 그의 첫 장편소설로, 섬세하고 농밀한 언어로 빚어낸, 경이롭고 독창적인 문학의 출현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영어권 지역에서 이 작품은 『이민자들』과 『토성의 고리』 다음으로 소개되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제발트의 작가적인 명성은 절정에 오르게 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두 편의 짧은 이야기와 두 편의 긴 이야기로 직조된 『현기증. 감정들』은 각각 별개인 듯 보이지만 하나의 우주 안에 있는 네 개의 성좌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스탕달과 카프카에 화자 자신을 겹쳐넣고, 단테와 발저, 루트비히 2세, 그릴파르처, 카사노바 등 이미 죽은 이들과 마주하는 환영에 사로잡혀 흘러다니는 일종의 여행 문학이자, 제발트의 작품 중 드물게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일종의 자전 문학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로 떠난 작가들 1813년의 스탕달, 1913년의 카프카, 그리고 (2013년의) 제발트
첫번째 이야기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은 우리에게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졌으며 『사랑에 대하여』와 『적과 흑』 등의 저자인 마리 앙리 벨의 이야기다. 화자는 이 글에서 끝없이 떠돌며 여행한 어느 작가의 삶을, 그중에서도 1813년 9월 한 여인과 북이탈리아로 떠난 여행을 화폭에 담듯 그려낸다. 두번째 이야기 「외국에서」는 화자가 1980년과 1987년 오스트리아의 빈과 북이탈리아의 곳곳을 여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빈의 거리를 걸으며 화자는 고향에서 쫓겨난 시인 단테를 보고, 베네치아에서 수상버스에 앉아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와 마주치며, 리바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카프카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 소년을 본다.
화자의 이탈리아 여행은 1913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행적을 반영한 것이다. 1813년에 떠난 스탕달의 이탈리아 여행은 카프카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1913년이라는 숫자로 이어지며 모종의 암시를 준다. 이 암시는 다음에 나오는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에서 절정에 이른다. 화자가 막연하게 추적하던 카프카라는 발자국이 일순 드러나며, 독자들은 비로소 카프카의 여행과 스탕달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겹쳐지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이야기 「귀향」은 두번째 이야기 「외국에서」를 뒤따르는 화자의 또다른 여행기로,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몇십 년 만에 방문하는 내용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살았던 건물 여관에 투숙하며 당시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는데, 여기에는 전쟁이 남긴 신체적 정신적 파괴의 흔적을 간직한 마을의 인물들이 점점이 나타난다. 고향을 떠도는 여행을 마치며 그는 2013이라는 숫자를 남기는데, 이는 1813, 1913이라는 숫자의 계보를 예언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네 편의 이야기, 그리고 스탕달, 카프카, 화자-저자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하나의 모티프는 카프카의 단편 「사냥꾼 그라쿠스」다. 슈바르츠발트에서 영양을 쫓던 그라쿠스, 실수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그라쿠스, 그러나 그를 저세상으로 실어다주어야 할 배의 키잡이가 방향을 잃어, 그라쿠스의 시신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채 떠돌다 이탈리아의 리바로 오게 된다는 이야기. 의식 속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까지 걷고 또 걷는 화자의 여행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도는 그라쿠스의 처지와 이렇게 포개진다.
제발트라는 세계 폐허의 기억이라는 여행 서사의 본질, 과거를 바라보는 화자의 의식
제발트의 서사의 핵심은 언제나 ‘여행’이다. 여행 서사의 본질은 끝없이 파생되는 사유의 미로에 기꺼이 빠져들고, 길 위에서 떠오른 감정과 인상을 직관적으로 배치하여, 너울거리듯 여행하는 고독한 화자의 의식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그리하여 파괴의 비전(미래상)에 이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중 스탕달은 꿈에서 모스크바 대화재를 지켜본다. 그리고 「귀향」에서 화자는 새뮤얼 피프스의 『일기』를 읽으며 졸다가 런던 대화재를 꿈꾼다. 이렇듯 『현기증. 감정들』은 제발트 고유의 주제들 여행하는 작가의 삶, 가볍게 되기, 기억하기, 고뇌에 시달리기, 파괴의 비전 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제발트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텍스트의 한 부분으로 활용했다. (이 장치는 그의 유작 『캄포 산토』까지 이어진다.) 이 사진들은 텍스트를 보충하는 자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텍스트의 일부분을 이루며, 과거라는 시간을 생생하게 환기하는 지표가 된다. 문자의 놀라운 생존력에 대해 누구보다 신중하게 접근하면서도 문자 언어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기억의 문제가 아닐까. 옮긴이 배수아는 “제발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기억을 불러내오는 독특한 기술에 매혹되곤 했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제발트에게 사진은 문자 언어로 언어화되지 않는 의식에서 삭제된 과거를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리는 정교한 장치다. 이 구성이 불러오는 효과는 다시, ‘기억하기’에서 화자의 ‘의식’으로 옮아간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제발트가 해낸 이 모든 몽타주 작업을 화자-저자의 의식을 의식하면서 바라보게 된다. 공포, 마비, 혼미함에 휩싸인 화자의 심리를, 신발이 닳아버릴 때까지 걸어다니는 고독을, 차분하고 총명한 의식을 예리하게 하는 정신적 고통을. “그렇게, 제발트를” 따라간 독자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학이라는 행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