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에 대해 바울이 한 말이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닌지 매우 두렵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실제로 많은 사람이 지식 없는 열심, 계몽 없는 열정에 빠져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심을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열심 없는 지식이 지식 없는 열심을 대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식에 근거한 열심과 뜨거운 지식 모두를 원하십니다. 프린스턴 신학교 총장이었던 존 맥케이(John MacKay) 박사는 “성찰 없는 헌신은 광신적인 행동을 낳고, 헌신 없는 성찰은 모든 행동을 마비시킨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반지성주의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현대 세계는 어떤 사상에 대해 ‘그것이 진리인가?’를 묻기보다 ‘그것이 효과적인가?’를 먼저 묻는 실용주의자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행동주의자적 기질, 즉 어떤 대의명분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주장하는 대의명분에 어떤 선한 목적이 있는지, 또 자신의 행동이 그 목적을 추구하는 데 최선의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곤 합니다. 스웨덴에서 열리는 한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호주 멜버른에서 온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수련회가 진행되던 중 그 청년은 자신의 대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불끈 쥐고는 “조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하며 안절부절 했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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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창조, 계시, 구속, 심판의 위대한 교리를 통해 우리가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고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말씀으로 소통하심으로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mind)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지식에 대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일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퍼져 있는 오늘날의 반지성주의 풍조는 이제 악으로 간주될 정도로 심각해졌습니다. 반지성주의는 절대로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풍조의 일부분이며 세속성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지성을 모독하는 것은 기독교 기본 교리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는데, 우리에게 주신 인간성을 우리가 부인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지성을 새롭게 해주셨는데, 지성을 다해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인데, 지혜로운 자가 되어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마 7: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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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특성 가운데 믿음보다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믿음에 관해 두 가지 부정적인 정의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은 덮어두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던 미국의 반초자연주의자 H. L. 멘켄은 믿음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것에 대한 비논리적인 신념”으로 간단히 정의 내린 바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냥 덮어두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쉽게 속는 것이며, 전적으로 무비판적이고 무분별해지는 것이며, 자신의 믿음에 있어서조차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믿음과 이성이 양립가능하지 않다는 가정은 완전히 오해입니다. 믿는 것과 보는 것을 상반되게 보는 성경 구절이 있긴 하지만(고후 5:7), 사실 믿음과 이성이 꼭 상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성적입니다.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확실한 것들을 지적으로 숙고하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신앙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이는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생긴 혼란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사고의 능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어떤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사고방식을 바꾸면 삶도 바뀐다는 사실이다”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장과 “인간은 자신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그것이다”라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주장을 차용합니다. 그렇게 필은 긍정적인 사고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결국 긍정적인 사고를 믿음과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 p.57-58
로마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한 복음 선포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합니다. 그는 죄인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하지 않을 게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할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3-14, 17).
바울의 논지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견실한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구원 사역을 충분하게 제시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듣는 자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복음 전파는 너무 막연한 나머지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 또 왜 결정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저 듣는 이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감정적이고 반지성적인, 비참한 오늘날의 전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 p.7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