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1945년 광복 이후 활발한 발전을 해오던 송무관, 청도관, 지도관, 무덕관, 창무관 등 각 관의 지도자들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수련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도장의 전국적 확산에 따라 전국적 조직체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기술과 수련체계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승단심사제도의 통일, 더 나아가서 태권도의 스포츠로서의 발전에 대한 필요성의 인식이 더욱 높아져 갔다. 또 일부 지도자들은 이미 태권도가 가진 국제적 보급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의 실현을 위하여 협회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태권도 대내외의 환경적 변화에 기인한 새로운 인식은 마침내 협회 창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1961년에 이루어진 협회 창립은 이후 태권도를 통일적 체계를 갖춘 하나의 무도 종목으로, 하나의 독특한 스포츠 종목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적 보급이 가능한 한국의 대표 무예스포츠 종목으로 발전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970년대〉
60년대에 추구된 경기화는 태권도 기술에 중대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발차기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기술체계를 발전시키게 된 태권도는 70년대를 맞이하여 국제화에 본격적인 노력을 하였다. 1971년 김운용 회장을 영입하게 된 태권도협회는 이종우, 엄운규 등 지도자를 중심으로 국기원 건립, 세계선수권대회창설과 세계태권도연맹의 창립 등 괄목할 발전을 이루면서 태권도의 국기화, 세계화에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해외로 진출한 수많은 사범의 노력으로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보급되는 성과와 함께 김운용 회장의 뛰어난 스포츠외교 감각과 남다른 노력으로 태권도의 국제 스포츠로서의 위상이 점차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70년대를 통하여 이루어진 기술, 이론 및 연구, 교육, 제도와 행정, 보급, 외교 등 제반 분야의 성취는 이후 태권도가 이룩한 놀라운 성취의 원동력이 되었다.
〈1980년대〉
국제 스포츠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숨 가쁜 노력을 기울여온 태권도는 1975년 국제경기연맹(GAISF)에 가맹 성공과 1980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3차 총회)로부터 태권도 종목과 세계연맹을 승인받게 됨으로써 드디어 국제 스포츠로서의 스포츠 외교적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어서 이루어진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성공은 태권도의 국제 스포츠로서의 발전에 두 번째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 기반을 딛고 태권도는 1986년 아시안게임 정식종목,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 1983년 올아프리칸 게임과 팬암게임 태권도 정식종목 결정 등의 실적을 착착 쌓아갈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김운용 회장의 1986년 국제경기연맹(GAISF) 회장 당선과 IOC 위원 피선, 그리고 1986년 IOC 집행위원 피선은 태권도의 국제 스포츠로서의 발전에 확실한 지렛대가 되었다.
〈1990년대〉
1980년대를 통하여 이루어진 전 세계적인 태권도의 보급과 활성화, 그리고 특히 국제 스포츠계에서의 성취에 힘입어 태권도는 자신감으로 충만하였으며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향한 야망을 대내외적으로 확실하게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시범종목 채택에 이어 1993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등 야심 찬 행보를 보였으며, 국내에서는 올림픽종목 채택추진위원회 구성(1994) 등 구체적인 노력을 가시화하였다. 드디어 1994년 9월 4일 제103차 IOC 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경기종목으로 태권도가 채택되는 역사적 쾌거가 실현되었다.
1961년 협회 창립으로부터 불과 30여 년만에 스포츠로 변신의 첫걸음으로부터 국제적인 스포츠 종목으로, 그리고 드디어 올림픽경기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올림픽종목 채택의 여파는 국내 태권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성장 여파를 나타내었다. 다수의 실업팀 창단과 학교팀의 증가와 함께 도장의 활성화 등 태권도 전반의 활성화가 나타났으며, 1996년 정부는 태권도를 한국문화의 10대 문화상징의 하나로 지정하였다.
〈2000년대〉
2000년 시드니올림픽경기에서 사상 최초로 올림픽 경기에 참가함으로써 태권도는 최고의 성취를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발전의 최정점에서 태권도는 새로운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최초의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선수선발과 코치진 선발과정, 그리고 올림픽 경기의 경기력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01년에 발생한 대학생들의 시위사태는 태권도계에 민주화와 아래로부터의 목소리의 새로운 분출이었다. 김운용 회장의 퇴진으로까지 연결된 시위와 폭력사태는 그다음 해 이루어진 최초의 회장 경선에서 극단적 자기주장과 타협 없는 갈등으로 협회를 위태롭게 하였다. 전, 현직 회장을 비롯한 많은 관계자가 구속 또는 실형을 선고받는 불행한 사태의 끝에도 팽배해진 불신과 갈등, 그리고 비타협적 분위기는 2000년대 내내, 때로는 수면 위로 그리고 때로는 수면 아래에서 태권도계를 요동치게 하였다. 국내 태권도계의 정치적 불안과 함께 도장 수련생의 주 대상인 취학 아동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급증한 도장 수로 인하여 도장의 경영환경 악화 역시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도장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 협회의 정책은 이러한 사회적 변수에 의하여 그 효과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올림픽 종목으로 격상된 태권도가 가져온 또 다른 하나의 산물은 국제 경기력의 급격한 상승이었다. 아테네올림픽과 북경올림픽, 특히 1995년, 1997년, 1997년 그리고 안마당에서 개최된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지속해서 목격된 한국선수단의 경기력 저하는 결국 종주국의 기술발전 한계 못지않게, 세계 각국의 경기력의 급성장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2000년대는 대한민국 태권도계에 대두한 민주적 성숙과 제도 개선의 요구는 도장 경영 활성화와 국제 경기력 제고라는 현실적 과제와 함께 종주국 협회의 앞날에 새로운 도전을 던지고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