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동국대학교,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초빙 교수로 있다. 옮긴 책으로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조나단 스위프트의『통 이야기』,『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책들의 전쟁』, 헨리 필딩의『 톰 존스』 등이 있다.
그날은 내게 기억할 만한 날이었다. 내게 큰 변화를 만들어 준 날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건 어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생에서 하루를 선택하여 삭제한다고 상상해 보고, 그러고 난 후 그 인생행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글 읽기를 멈추고 쇠로 만들어졌건 황금으로 만들어졌건 가시로 만들어졌건 꽃으로 만들어졌건 간에, 당신을 얽어매고 있는 긴 사슬이 만약 그 제일 첫 번째 연결 고리가 어떤 기억할 만한 날 맨 처음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당신을 꽁꽁 얽어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 보라.
(상) 본문 127면
바닥을 기어다니는 이런 벌레들이 주목을 끌어서 멀리서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바로 그때, 미스 해비셤이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얹었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는 손잡이 부분이 목발처럼 생긴 지팡이를 짚고서 거기다 자기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그 방의 주인 마녀 같아 보였다. 「이건 내가 죽으면 눕게 될 식탁이야.」 그녀가 지팡이로 긴 식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나를 보게 될 거다.」 그 순간 그곳에서 그녀가 식탁 위로 올라가 옛날 내가 장날에 보았던 소름 끼치는 밀랍 인형을 완벽히 구현한 모습으로 죽어 버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하는 바람에 나는 그녀의 손길 아래에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저것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녀가 다시 지팡이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는 저것 말이다.」 「뭔지 짐작도 못 하겠어요, 마님.」 「거대한 케이크다, 웨딩 케이크. 내 것이지!」 그녀는 노려보는 눈빛으로 온 방을 둘러보고 나서, 여전히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비틀며 내게 기댄 채 말했다. 「자, 자, 자! 나를 좀 걷게 해라. 나를 걷게 해달라고!」 (상) 본문 147면
「난 리치먼드로 가게 되어 있어.」 에스텔라가 내게 말했다. 「우리에게 내려진 지시 사항은 이런 거야. 리치먼드는 두 군데인데(하나는 서리 주에 있고 다른 하나는 요크셔 주에 있어) 내가 갈 곳은 서리 주에 있는 리치먼드야. 거리는 16킬로미터야. 나는 사륜마차를 타고 가고, 네가 나를 데려다 주게 되어 있어. 여기 지갑이 있어. 거기서 돈을 꺼내 네가 마차 삯을 지불하게 되어 있어. 참, 지갑은 네가 가지고 있어야 해! 너하고 나,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내려진 지시 사항을 따라야 할 뿐 다른 선택권이 없어. 너하고 나, 우리는 마음대로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게 되어 있어.」 지갑을 건네면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그녀의 말 속에 은밀한 의미가 담겨 있기를 바랐다.
부모 없이 억척스러운 누나와 매형의 손에 자란 핍은 우연한 계기로 미스 해비셤의 새티스 하우스를 방문하고 그녀의 양녀인 에스텔라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가난한 핍을 냉대하는 쌀쌀맞고 도도한 에스텔라의 태도에 핍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비루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그 후 매형의 대장간에서 도제 생활을 하게 되지만 에스텔라를 잊지 못한 채 가슴 깊숙이 〈신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키워 오던 어느 날 이름 모를 이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