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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사회계층

현대 중국의 사회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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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6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744쪽 | 842g | 153*224*35mm
ISBN13 9788994054704
ISBN10 899405470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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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양지성
1940년 중국 후베이(湖北) 성 시수이에서 태어나, 1966년 칭화대학(淸華大學) 이공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관영 통신사 신화사(新華社)에서 35년 동안 근무했다. 그동안 수천 편의 기사와 보고 문학, 수백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기술상품과 기술시장(技術商品與技術市場)』, 『기술 무역학(技術貿易學)』, 『덩샤오핑 시대(鄧小平時代)』, 『현대 중국의 사회계층(中國當代社會階層分析)』, 『중국 개혁시대의 정치투쟁(中國改革年代的政治鬪爭)』, 『묘비(墓碑): 중국 1960년대의 대흉작 실록』, 『30년 허둥(三十年河東)』 등이 있다. 2001년 신화사에서 퇴직한 이후, 『중국 개혁(中國改革)』 등 여러 잡지의 편집위원, 고문을 역임했다. 2003년 개혁 성향의 중국 공산당 원로들이 1991년 창간한 잡지사 『염황춘추(炎黃春秋)』에 들어가 현재 부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 중 『묘비(墓碑)』는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전역에서 발생한 기아 상황을 오랜 세월 면밀하게 수집하여 기록한 책으로, 중국 대륙에서는 금서로 분류되어 홍콩에서 출판되었고, 영어, 프랑스어 등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현대 중국의 사회계층』 역시 1999년 4월에 원고가 완성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출간할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2000년 홍콩에서 출간되었다. 그 후, 자료의 보완을 거쳐 드디어 2006년에 중국 대륙에서 출판되었지만, 홍콩 출판본과 비교하면 제2장과 제18장의 마지막 부분이 정치적인 문제로 빠졌고, 그 책은 더 이상 중판(重版)되지 못했다. 결국 2011년이 되어서야 해금(解禁)되어 공개적으로 시판될 수 있었다.
역자 : 박종연
1993년에 영남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고, 1995년과 2001년에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근대한어 전공)를 취득했다. 그 후 2003년에 다시 중국 난징대학교에서 중고한어(中古漢語) 전공으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인제대학교 중국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논어역주』, 『경서천담』,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 『조각가의 혼』, 『담판』, 『회사생활이 편해지는 의사소통의 기술』, 『직언과 포용의 인간학』, 『노트테이킹만 알면 당신은 벌써 중국어 전문가』, 『Fun Fun 일러스트 중국 이야기』, 『비즈니스 중국어』(공역) 등이 있다
역자 : 이웅길
1983년에 영남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고, 1986년과 1994년에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부터 동서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양한(兩漢)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음운학을 전공하였다. 옮긴 책으로는 『고대중국어 어법』, 『중국의 명신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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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까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평등도 필요하면서 효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평등을 강조하면, 일부 능력 있는 사람들의 적극성을 억제하여,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 물론 불평등은 한도가 있다. 과도한 불평등 또한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불평등은 사회가 인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있어야 한다. 과도한 불평등은 사회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 p.27

사회에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점유하는 사회자원(경제자원·권력자원·지식 문화자원)의 차이가 바로 불평등이다. 불평등의 상황은 지위가 유사한 무리들이 계층을 이루도록 한다. 이러한 계층은 사회를 하나의 등급 계열로 만든다. 동일한 등급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공동의 이익과 목표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 공동의 생활권을 갖고 있다. 이 생활권에 속한 사람들의 이익과 목표는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이익과 목표와는 다르며, 어떤 경우에는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들이 사회에서 행하는 많은 정치적 행위는 그들이 처한 계층의 공동 이익에 근원을 둔다. 상위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사회 안정을 도모하여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려고 한다. --- p.29

사회분층은 각종 불평등 현상에 따라 사람들을 몇 개의 사회등급으로 나눈다. 사회분층은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일정한 자원을 갖고 있지만, 그 가진 크기가 다르다고 가정한다. 가진 자원의 크기 차이로써 사람들이 어떠한 계층에 처해 있는지를 구분한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층에 대한 분석은 계층 간의 모순을 완화시키고, 각 계층의 이익을 조절하는 지름길을 찾아서, 사회 안정을 보장할 수 있다. 계급 분석은 양극 대립을 이끌어 내어, 사회분층이 여러 방면으로 조화롭게 되도록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서구의 일부 사회학자 저서 중에는, 계급 분석과 계층 분석을 혼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구분하지 않기도 하지만, 실제 그 내용은 여전히 계층 분석에 관한 것이다. --- p.31

“문화대혁명” 이전,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삼는다”는 사상의 지도 아래, 중국 사회는 다음과 같은 각종 정치적 신분이 있었다. 농촌에는 고용농[고농(雇農)]·빈농·하중농(下中農)·중농·상중농(上中農)·부농·지주가 있고, 도시에는 혁명 간부·혁명 군인·열사(烈士) 가족·노동자·점원·직원·도시 빈민·수공업자·경영 간부·소기업주[소업주(小業主)]·자산계급·공상업 겸 지주·매판자산계급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도시와 농촌에는 또한 반혁명분자·불량분자·우파분자가 있었다. “무산계급 독재정치 하에 혁명을 계속하는 이론”은 이러한 신분을 더욱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의식 형태 방면의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무산계급은 반드시 상층구조에 있어야 하며, 그 속에는 각 문화 영역 중에 자산계급에 대해 전면적인 독재정치를 시행하는 것을 포괄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지주·부농·반혁명·불량분자·우파(地富反壞右)”는 “흑오류(黑五類)”라고 불렸고, 그 밖에 또 “주자파(走資派)” 신분까지 더 추가했다. 마오쩌둥은 지식인에 대해 두 가지 기본적인 평가를 했다. 건국 17년 이래(1949~1966), 교육 전선에서 기본은 자산계급 독재정치였고, 지식인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자산계급이었다. 지식인은 신뢰를 받지 못하는 계층이었다. 지식인들은 말로만 지주·부농·반혁명·불량분자·우파·자본가·주자파·가교육자녀(可敎育子女)·지식인으로 분류되었다. 지식인은 9위에 이름을 올려, 스스로를 “못난 아홉째(臭老九)”라고 비웃었다. 그중 “가교육자녀”는 “주자파”의 자녀와 “지주·부농·반혁명·불량분자·우파”의 자녀를 가리켰다. 사실상 “지주·부농·반혁명·불량분자·우파”의 자녀는 “주자파”의 자녀에 비해 신분이 더 낮았고, “주자파”가 일단 원래의 직책에 복직하면, 그의 자녀의 지위는 크게 올랐다. 출신 성분은 그가 출생하기 전에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고, 그의 사회적 지위는 그 본인의 능력이나 노력과 무관했다. --- p.52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중국의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는 천지가 뒤집힐 정도의 큰 변화가 생겼다. 새 정권은 관료자본과 매판자본을 몰수하면서, 사회주의 국유경제의 첫 단추를 끼웠다. 1949년, 미약한 공업 기초 위에, 국유공업의 비중이 26.2%이고, 집체공업(集?工業)은 0.5%, 공사합영(公私合營)은 1.6%, 사영공업(私營工業)이 48.7%, 개체수공업(個?手工業)이 23%를 차지했다. 이에 상응하는 것으로, 관료자산계급과 매판자산계급이 무너지고, 중국 공산당 지도하의 4대 계급, 즉 노동자계급과 농민계급, 도시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이 나타났다. 지식인계층은 도시소자산계급에 포함되었다. 이 네 계급은 오성홍기에 네 개의 작은 별로 대표된다. 그들은 공산당을 뜻하는 큰 별을 둘러싸고서,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었다. --- p.67

1978년 이후의 제도 변화는 또한 중국 통합 형태의 변화이다. 개혁 개방 이전은 강력한 행정통합이었다. 이러한 통합은 첫째는 국가가 자원에 대한 전면적인 독점에 의지했고, 둘째는 당의 조직 시스템과 행정 권력 시스템, 당 조직의 지도하에 공(工: 工會)·청(靑: 靑年團)·부(婦: 婦聯) 조직 시스템에 의지했다. 개혁 개방 이래, 과거의 통합 형태는 강력한 충격을 받고, 행정통합 역량도 크게 약화되어, 사회가 새로운 통합 형태를 모색하고 있었다. 총체적인 추세는 행정적인 통합에서 계약적인 통합으로 가는 과도기이다. 시장경제 조건 하에서, 계약적인 통합은 사회통합의 기본 특징이다. 하지만 통합 형태의 전환은 비교적 긴 시간의 과도 과정으로, 과도 과정 중에 어느 정도의 혼란과 마찰이 나타날 수도 있다. --- p.69

공업화는 필연적으로 도시화를 가져온다. 도시화 과정은 공업화와 시장화의 요구를 시작으로, 농촌 노동력이 도시로 완만하게 이동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도시화 과정은 대량의 노동자 직업의 변동 과정이기도 하다. 양자는 서로 인과관계를 이룬다. 세계 선진국의 도시화 과정은 점차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 과정은 한 세기를 뛰어넘었다. 1978년 이전, 중국의 도시화 과정은 대단히 완만했다. 그러나 개혁 개방 이후, 특히 20세기 말에는 도시화 과정의 속도가 빨라졌다. 중국 도시의 수는 1979년의 193개에서, 2004년에는 661개로 증가했다. 2004년 12월 31일에 이르자, 전국에는 모두 661개의 시가 있었다. 그중에는 직할시(直轄市)가 4개, 지급시(地級市)가 283개, 현급시(縣級市)가 374개였다. 성진 인구의 비중도 해마다 증가했다. --- p.92

1955년, 중국 국가기관 직원들의 직급과 임금 기준이 통일되었다. 이듬해, 전국의 기업과 사업체·국가기관의 임금제도를 개혁했다. 그런 후 30개 직급의 간부가 만들어졌고, 이러한 직급에 맞추어 각 수준에 맞게 임금 기준을 조절했다. 그러나 평등주의의 영향 때문에 등급과 등급 사이의 격차는 계속 줄어들었다. 1956년 간부의 최고와 최저 임금격차는 31배였으나, 이듬해에 27배로 떨어졌다. 1959년에 다시 17.6배로 떨어졌고, 1985년에는 10배로 떨어졌다. 개혁 개방 이후, 이 임금격차는 크게 변동되지 않았다.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각 기관에서는 임금제도 이외에 새로운 동력을 찾았다. 이렇게 해서, 원래 있던 임금제도는 점차 효력을 잃었다. 이 때문에, 임금 이외의 소득이 크게 증가했으며, 임금성 소득은 근로자 전체 화폐소득 중에서 해마다 비중이 줄어들었다. 국가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82년 이 비중은 74.9%였고, 1989년 55.9%,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50%정도까지 떨어졌다. 이것은 평균 수치로, 일부 사람들에게는 임금 외 소득이 임금소득을 크게 초과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상황이 다소 역전되어, 국가통계국 도시사회경제조사총대(城市社會經濟調査總隊)가 전국 5만 4,000여 성진 주민 가정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한 결과, 2005년 1/4분기에 성진 주민 임금소득은 전체 소득의 비중이 69.0%를 차지했다. --- p.105

개혁 개방 이래 1990년 전반기까지, 주민 개인소득은 국민소득 중에서 차지하는 몫이 매년 확대되었다. 개혁 개방 이전의 수십 년 동안에, 국가는 고축적과 저소비 정책을 시행하여, 주민들을 매우 빈곤하게 만들었다. 개혁 개방 후 10년 동안은, 적당히 개인에게 치중되어, 주민들에 대한 일종의 보상을 해주었다. 그러나 개인의 비중이 이 부분의 재부를 확대하여, 그 분포가 불평등했다. 어떤 사람은 매우 많이 받고, 어떤 사람은 매우 적게 받았다. --- p.109

오늘날, 불공정한 재산분배의 원인 중 하나는 부패이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경제개혁 과정 중의 부패이다. 새로 내놓은 모든 경제개혁 조치는 몇몇 사람이 공적인 것을 사적인 수단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이 큰돈을 벌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경제개혁 초기에, 그들은 경제개혁이 그들이 갖고 있는 국유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경제개혁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지만, 후에 그들은 경제개혁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통제권을 실질적인 소유권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모두 유신(維新)에 참여했다.” 일부 원래 “공유제를 고수하자”라는 명목으로 스스로 기업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려던 사람들도 현재는 국유자산 개편의 기회를 이용하여, 돈을 쓰지 않고(국유은행에서 돈을 빌리거나) 국유기업이나 혹은 집체 소유의 기업을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일부는 또한 기업 직원에게 돈을 내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직원을 “해고”시켰다. 사람들은 정치체제 개혁을 통해 부패가 제거되기를 기대하지만, 이미 권력을 이용해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에게, 정치체제 개혁은 그들이 “돈세탁” 하기 좋은 기회가 된다. 국가 정치제도의 변경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약탈한 재산을 합법화시키려 한다. 사회주의와 공산당의 허울이 없으면, 그들은 더욱 대담하게 마음 놓고 재산을 약탈할 수 있을 것이다. --- p.169

개혁은 일부 공공권력을 정부에서 사회로 바뀌어 놓았다. 당정(黨政)이 분리되고, 정부와 기업이 분리됨에 따라서, 과거에 고도로 집중된 권력이 기업과 사회와 시장으로 옮겨졌다. 개혁이 행정 권력의 활동 범위를 축소시키고, 사회 권력의 유동 범위를 확대시켰다. 행정 권력이 점차 일부 영역에서 물러나면서, 중개기구, 기업, 사회조직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국가와 사회 일체화 패러다임이 해체되고 있다. 국가와 사회의 분리는 과거에 못하는 것이 없고,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었던 행정 권력을 사회로 양도시켰다. 당연히 이것은 단지 일종의 추세로, 지방마다 영역마다 이러한 권력 이동의 정도와 속도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농촌을 예로 들면, 과거 농촌 정권은 농민의 모든 생존 조건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농촌에서 생산 책임제(聯産承包制)를 시행한 후, 이러한 권력의 일부는 향진 기업으로, 일부는 농가로, 일부는 시장으로 옮겨 갔고, 향촌 행정 권력의 실속이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그러나 당정 분리와 정부와 기업의 분리가 실제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농촌은 여전히 당 지부(支部)가 모든 것을 통제했고, 크고 작은 일 모두를 당 지부 서기 개인이 말하는 대로 결정되었다. --- p.181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농업의 축적물에 의존하여 공업화 실현을 재촉하는 전략을 시행했다.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 자금은 어디에서 왔을까? 결국 농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공업 분야의 노동자들이 밥을 먹어야 하는데, 양식은 어디서 왔을까? 농업에 의존해야 했다. 일용 공산품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원료는 어디에서 왔을까? 농업에 의존해야 했다. “농업은 국민경제의 기초”로, 솔직히 말하면, 바로 농민들이 앞에서 말한 각종 무거운 부담을 지도록 했다. 농업이 공업건설의 자금을 축적하는 주요 방식은 바로 농공업 제품의 “협상 가격차”이다. --- p.224

경직된 관리 제도는 농민이 굶주리는 원인 중 하나였다. 모든 생산대는 어떤 농작물을 심을지 상부에 승인을 받아야 했다. 상부에서는 현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주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려, 농민들을 헛고생시켰다. 농민이 매일 무엇을 하고, 어느 땅에서 일하는지를, 모두 생산대장이 처리하도록 했다. 매일 아침 시골 마을 어귀 나무 아래에 집합해서 대장이 일을 할당해 주기를 기다렸다. 일을 배분하는 데 있어서는 똑같은 대우를 받아서, 노동 효과나 개인의 수익은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농업생산 효율은 떨어지고, 식량 생산량은 매우 낮았다. 효율이 떨어진 집체노동은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활로를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집체노동에 참가하는 것 이외에,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노동을 해서 먹을 것을 찾고 소득을 높일 수 없었다. --- p.226

도시화의 가속과 공업 건설 용지의 증가에 따라, 공업과 도시 건설로 농민과 땅을 다투는 문제가 갈수록 첨예해졌다. 도시 건설과 공업 건설의 주도자는 각급 정권과 대기업으로, 그들에 비해 농민은 소외계층이어서,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전국에서 땅을 빼앗긴 농민이 4,000만 명에서 5,000만 명 사이로, 여전히 매년 200여만 명이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땅이 없고, 출근을 하려 해도 일자리가 없으며, 최저생활 보장에도 배당된 것이 없어서”, 생활이 매우 곤란했다. 1급 시장(시장 증권이나 분양 주택을 처음으로 발행하거나 판매하는 시장)에서는, 계획경제의 수단으로 농민의 토지를 수용했다. 단지 몇 년 동안의 생산량에 따라 땅값을 지불했지만, 농민의 발전과 양로·의료보장은 고려하지 않았다. 2급 시장(중고 시장)에서는, 완전히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거래하여, 땅 한 무에 수십 만, 수백 만 위안에 팔았다. 그러나 어떤 지방은 토지 수용 보상금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심지어 모 간부의 수중에 떨어지기도 했다. 토지 수용 과정에서 관료와 상인들이 결탁하여 개인적으로 토지의 이익을 나누는 부패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 p.256

주목할 만한 것은, 현재 중국 농촌에서 향촌 간부·향촌 사유기업주·향촌 신용조합·양곡 수매소·토지 관리기구·공안 사법기구 등 기관의 지도자가 점점 강력한 하나의 집단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농민에 대해 비용을 받고, 벌금을 부과하고, 토지 하청을 주며, 토지 수용비의 분배, 산아제한 지표의 분배 등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지위가 있고, 경제적인 힘이 있어서, 농민들은 그들을 겉으로는 공경하는 척하지만 멀리한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위로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저항을 하고, 아래로는 농민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중앙정부는 토지 도급을 30년 동안 변하지 않도록 요구하여, 농민들에게 장기간 토지 경영권을 보장하도록 했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이 토지 발주권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단기 도급과 빈번한 조정에만 열을 올렸다. 농민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양곡 수매 보호 가격을 제정했지만, 그들은 보호 가격에 따라 양곡을 수매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 가격을 이용해서 국가 양곡 수매 대부금과 재정보조금을 몰래 얻어갔다. 중앙정부는 촌급 재무를 공개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거짓으로 공개했고, 중앙정부는 직접 촌 위원회 구성원들을 선출하도록 요구했지만, 그들은 거짓 선거를 하거나 아예 직선제 보이콧을 하거나……. 이 사람들과 농민들의 모순은 매우 첨예하며, 향촌 충돌의 중요한 기폭점이다. --- p.272

농민이 대량으로 농업과 농촌에서 비농업과 도시로 옮겨 간 것은, 한 국가가 농업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연적인 현상이다. 중국 사회가 바로 이러한 변화 속에 있으며, 이것은 중국 농민공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말 20년부터 21세기 초 20년까지의 근 반세기 동안, 중국의 2억이 넘는 인구는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이것은 중국이 현대화하는 데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역사적 과정을 실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중국 농민공 집단이 생겨난 것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농촌 노동력의 대량 과잉이고, 둘째, 도농 경제 격차와 지역 경제 격차의 확대이며, 셋째, 농민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조건이 생겼기 때문이다. --- p.285

사회 경제발전의 측면에서 보면 농민공의 잉여노동이 현지의 재부를 만들었고, 그들의 소비가 현지의 번영을 촉진시켰다. 도시생활에서 농민공의 공헌은 각 도시 가정과 관계있으며, 각 도시 주민과 관계가 있다. 오늘날 일부 대도시는 농민공이 떠나고 나면, 현지 사회생활이 멈춰버릴 것이다. 이 점은 베이징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만약 농민공이 전부 철수하면, 베이징 가정은 보모가 없어서 시민들은 아침을 먹을 수도 없고, 야채를 살 수도 없다. 거리에는 쓰레기를 치울 사람도 없고, 가정의 시설이 고장 나도 수리를 부탁할 곳도 없으며, 대량의 식당이 문을 닫고, 건설 현장은 전부 일을 중단해야 한다. 다시 말해, 베이징 시는 죽은 도시가 될 것이다. --- p.317

경제발달 지역과 대도시는 노동력 시장이 세 집단으로 나누어진다. 현지 노동력과 외지 성진 주민·외지 노동자이다. 이 세 종류의 사람은 취업 기회와 종사하는 업종·임금 대우 및 생산 중에서의 분담과 지위가 서로 다르다. 현지 노동력은 일반적으로 경지를 하청 주고, 주택을 임대하고, 자영업 혹은 사적으로 상공업을 경영하거나 혹은 현지의 인사 관계가 필요한 일에 종사한다. 공장장이나 기업 관리자·통관사·보관원·보안요원은 대부분 현지 사람이다. 현지 주민은 그 지역의 토지와 산업의 소유자이며, 또한 토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외지 성진 인원은 비교적 높은 과학기술 문화 수준과 사회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들은 기술 업무와 관리 업무·기타 “화이트칼라” 업무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 온 농민공은 절대 다수가 생산현장에서 일을 하는데, 고통스럽고, 더럽고, 지치고, 위험한 일은 모두 외래 농민공이 한다. --- p.320

1995년쯤, 국유기업이 짊어진 역사적 부담은 세 가지로, 지나치게 높은 자산 부채율(86%), 과도한 잉여 인원(대략 총인원의 3분의 1), 학교나 병원 등과 같이 마땅히 사회가 맡아야 할 일을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큰 짐을 소화해야 함으로써 기업은 커다란 역경을 겪었다. 잉여 인원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인원을 줄여 효과를 높이는 것(減員增效)”을 해야 했다. 1995년 이후, 중앙정부는 “인원을 줄여 효과를 높이는 것”을 국유기업 개혁의 중요 정책으로 삼았다. “인원을 줄여 효과를 높이는 것”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일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1995년, 국유 경제 기관의 근로자는 1억 955만 명이었다. 인원을 줄여 효과를 높이는 것을 통해, 2002년에 근로자는 6,924만 명으로, 4,031만 명이 줄어들었다. 국유기업을 떠난 4,000여만 명 중, 일부는 다른 소유제 기관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실직자가 되었다. --- p.372

개혁 이전의 방법에 따르면, 취업은 정부의 노동부서에서 책임지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분배했다. 당시 사람들이 선호하는 일자리 순서는 첫 번째가 국영공장, 두 번째가 국영상업, 세 번째가 집단공장을 꼽았다. 그러나 수천만 명이나 되는 청년이 한꺼번에 도시로 돌아오자, 정부는 국영과 집단 상공업에 그들을 배치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정부는 한편으로는 각 부서에 집체기업을 설립하게 하여, 도시로 돌아온 청년들을 배정했고, 또 한편으로는 도시로 돌아온 청년들이 스스로 직업을 구하도록 호소했다. 스스로 직업을 구하게 한다는 것은 원래 체제 내 그들의 직업은 없었지만, 살 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어서, 그들로 하여금 개인 상공업에 종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당시 공상관리부는 개인 영업증(個體營業證)을 대량으로 발급했다. 각 향진 정부는 또한 가능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했으며, 언론에서도 자영업자의 사회적 공헌에 대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짧은 2, 3년 동안 자영업자는 크게 번성했다. 도시로 돌아온 청년 이외에, 과거 각종 이유로 국유기업에서 배척된 사람들(예를 들면 해고된 공직자·노동을 통해 개조되어 석방된 사람) 역시 이 행렬에 들어가게 되어, 이 집단에서 가장 대담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 p.402

중국 사회에서 사유기업이 다시 공개적으로 출현한 것은 1987년이었으나 대부분 비교적 사업하기 좋은 시기였던 1988년과 1989년에 세워졌고, 1989년이 되어서야 사유기업이 단독으로 등록하기 시작했다. 정책에서는 고용 직원이 8명 이하를 “개인 상공업자(個體工商戶)”라 했고, 8명 이상을 “사유기업”이라고 규정했다. 단독 등록 이전에 사유기업은 “개인 상공업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1988년 전국 개인 상공업자 수는 1,452만 7,068개로, 영업액은 119억 700만 위안이었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사유기업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89년 말 등록된 사유기업의 수는 9만 581개이며, 별도로 개인 상공업자가 1,247만 1,900개가 있었다. 1993년 말 사영기업은 법률 문건에서 사영기업이 아니라 사유기업으로 바뀌었다. --- p.408

취업은 현재 중국이 당면한 가장 첨예한 문제 중 하나이다. 1995년에서 2000년까지 전국에 1억 3,402만 명의 새로운 사회노동력이 증가했지만, 국유기관과 집체기관의 종사자 수는 4,807만 명이 감소했다. 2000년 전국 평균 각 기업주의 등록 자본은 33만 7,500위안으로, 자신을 제외하고 6.1개의 취업 일자리를 만들었다.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사유기업 취업 인원은 평균 매년 33.67% 증가했고, 같은 시기 국유기관과 집체기관의 종사자 수는 매년 평균 2.06%와 7.78%[장호우이(張厚義), 2001] 줄어들었다. 2008년 말 개인 사영기업에 취업한 인원은 7,904만 명에 이르렀고, 그중 투자자가 1,507만 3,600명, 고용 직원이 6,396만 2,000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540만 명이 늘어났다. 하지만 2008년 국유기관 취업 인원은 6,162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사유기업의 취업 인원수의 77.9%에 상당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사유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취업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출로임이 증명되었다. --- p.413

농촌에서 간부 이외에 대다수의 사유기업주는 일반 농민들과는 다른 이력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향진 기업에서 일을 했거나, 운송업을 한 적이 있거나, 장사를 한 적이 있거나, 군대에 갔다 왔거나, 외지에 나가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 향진 기업의 공장장이나 구매 담당, 마을 간부의 경력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은 교제 범위가 넓고 박학다식할 뿐만 아니라, 정보가 빠르며 상당한 사회적 관계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본인들도 두뇌 회전이 빨라서 농촌의 “능력자”라고 할 수 있었다. --- p.416

현대 중국의 사유기업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당한 방법으로 경영하여 사업을 일으킨 기업주(이 중 극소수만이 갑부가 되었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권력에 기대어 사업을 일으킨 “홍정상인”이다. 당연히 이 두 부류의 경계선이 매우 분명하지는 않다. 금권거래의 사회적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전자의 사람은 가능한 조건에서 아마도 최대한 관리의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벌었을 것이다. 현대 중국 사유기업주 전체에서 “홍정상인”은 소수이지만, 어느 정도 권력관계를 이용한 사람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 대형 사유기업에서 “홍정상인”의 비중은 더욱 크다. 현대사회에서 기업을 설립하는 데 권력관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최근 적발된 관리 부패사건 중 부정부패 공직자 주위에는 모두 그들에게 뇌물을 준 사유기업주들이 있었다. --- p.435

현재 소수의 사유기업을 제외하고, 절대다수는 국내에 발판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 일부 사유기업들은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2008년 중국의 비금융권 기관이 해외에 직접 투자한 금액이 406억 5,000만 달러이다. 상무부의 2007년 통계 공보에 따르면, 해외 직접투자 중에서 국유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19.7%이고, 유한책임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43.3%이며, 사유기업은 11%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유한책임기업 중에서 상당 부분은 사유기업의 자본이다. 앞으로 해외로 진출할 사유기업은 더 많아질 것이며, 내수형 기업에서 수출형 기업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국내시장에서 경쟁할 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경쟁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숫자로 보면 국내시장에 근거하고 있는 기업이 여전히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 p.459

어떤 사람은 개혁 개방 30여 년 후, 중국에는 지식인 계층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관리들이 이미 지식화 되었고, 새로 세워진 기업의 경영자 역시 문화 수준이 매우 높고, 이미 모든 계층에 지식인이 스며들어서 더 이상 독립된 지식인 계층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식인이 이미 전문기술자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초에 출판된 사회계층에 관한 연구 보고에서 “지식인”은 “전문기술자”로 대체되었다. 지식인 계층이 없다고 말하는 중요한 이유는 개혁 개방 이후 지식인 계층의 분화였다. 그러나 이 이유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개혁 개방 이래 지식인 계층만 분화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계층에서도 모두 심각한 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혁 개방 이래, 진정으로 지식인의 특징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문 지식인은 개혁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강해졌다. 지식인의 정의에 있어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 p.465

지금까지 중국 지식인은 한 번도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된 적이 없다. 그들은 단지 사회 지배자를 위한 참모가 되어 계책을 내놓았다. 참모 지위의 지식인은 권력에 예속되어 독립적인 인격을 갖기 어려웠으며, 또한 강대한 정신력을 가진 상품을 생산할 수 없었다. 오늘날, 이런 권력에 예속된 유전자는 아직도 많은 인문 지식인의 머릿속에서 작용을 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아부하여 빌붙고, 높은 신분에 오르려는 지식인들이 많이 있다. 이런 원인 때문에, 일부 인문 지식인은 “이단의 길”을 걸었다. 이런 상황은 각 학문 분야마다 존재했다. 현대 현학(顯學)인 경제학 분야에도 나타난다. --- p.481

개혁 개방 30여 년 이래로, 중국 여론 지식인의 상황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문화대혁명” 중에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사실이 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방법은 버림을 받았다.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 많아지고, 허위로 날조하는 것이 줄어들었다.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것이 줄어들고, 객관적인 보도가 많아졌다. 여론의 감독이 강화되어, 사악함을 규탄하고, 부패를 폭로하고, 시대의 병폐를 비난하는 보도들이 나타났다. 진리를 고수하고, 용감하게 싸우는 기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많은 기자들은 취재 중에 위험을 무릅썼다. 심지어 개인의 생사까지도 돌보지 않아서, 일부 기자는 언론을 위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많은 기자들은 “문화대혁명” 때 “바싹 뒤따름”, “눈치놀음” 위주의 업무방식을 바꾸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언론 사업에 종사할 수 있어서, 기자의 책임감·사업정신이 강화되었다. --- p.594

언론 부패의 심층적 원인은 관리 체제이다. 현재 당과 국가를 위해 말하는 신문에게는 국가가 결코 충분한 경비를 주지 않고 있다. 신문사 스스로 직접 “수익 창출”을 하도록 하고, 스스로 손익을 책임져야 해서, 언론기관의 책임자로서, 그가 직면한 가장 큰 스트레스는 경비 문제이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수익 창출”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었다. 언론기관의 상여금 수준은 “수익 창출”과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 있다. “수익 창출”을 많이 할수록 직원들이 받는 혜택이 많아져서, 편집자나 기자 역시 “수익 창출”을 중요한 위치에 놓았다. 비록 위에서 “수익 창출”과 언론 업무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실제로 구분하는 부서는 많지 않다. 언론기관은 특별한 수익 창출 수단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손익을 책임지려면 너무 많은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서, 광고 지면을 이용한 수익 창출이 가장 편리했다. 일부 경영이 아주 어려운 언론기관은 어쩔 수 없이 기자들에게 기업에 가서 돈을 요구하도록 부추긴다. 적극적으로 돈을 얻어 오도록 하기 위해서, 갖고 온 돈에서 개인이 20∼30%, 심지어 더 높은 비율의 리베이트를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 p.499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지식인은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지식인은 온전히 행정관리에 의지하여 관직을 받았으며, 관직을 얻기 위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행정 계단에서 행정관리에게 머리를 숙이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관직 이외에, 또한 갈수록 많은 활로가 있다. 지식만 있으면 자기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위치를 찾을 수 있다. “관본위(官本位)”는 반드시 시장에 의해 약화되고, 사회 분화에 의해 약화되어야 한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은 최근 몇 년, 어떤 단위는 “관본위”가 강화되는 추세로, 한 대형 언론기관의 규정처럼 직함 평가에 행정 직무가 있는 사람에게 “편향되어야” 하고, 관리가 되면 고급 직함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사물이 소멸하기 전에 잠깐 왕성해지는 현상에 불과하며, “관본위”가 소멸해 가는 징조로, 그들은 소멸 전에 “최후의 만찬”을 가지려고 했다. --- p.518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과거에는 정부로부터 고도로 집중된 일부 재부를 사회로 옮기려고 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비국유화라고 부른다. 만약 옮기는 것이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면, 계획경제에 비해 일종의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체제 개혁이 낙후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의 상호제어가 부족하고, 공무 활동이 공개적이지 않고 불투명해서, 재부가 계획경제 때에 수립된 권력체계에 따라 몇몇 개인이나 가족에게로 옮겨갔다. 각급 관리들이 재부를 옮길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수 없는 관리들은 큰 이득을 취했다. 그들이 취한 이득의 일부분은 지대추구를 통해 실현한 것이고, 일부분은 관리들의 경제 범죄에 의한 것이었다. --- p.547

외자기업은 중국에 등록된 독립 법인 기구이다. 그들은 중국 기관의 파견을 거칠 필요 없이 직접 중국인을 채용할 수 있다. 고용인은 외국기업이 제공하는 각종의 복리를 누릴 수 있고, 또한 중국 기관은 그 고용원에게 어떠한 연금도 제공할 필요가 없다. “신매판”들은 젊고, 학력이 높다. 베이징 외국기업 서비스 회사가 파견한 2만 4,000명의 외국기업 근로자 중에서 35세 이하가 70%로, 대학 졸업자가 80%를 차지했다. 그중에는 명문대학 출신의 비중이 매우 높고, 대학원생의 비중도 국유기업의 같은 업종에 비해 높았다. 그들 중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공산당원이었다. 예를 들어 베이징 외국기업 서비스 회사에서 파견한 직원 중에서 공산당원은 2,000여 명으로, 당원 비중이 10%에 가까워 국유기업보다 훨씬 높다. 그렇지만 그들은 제때에 당비를 내는 것 외에, 어떠한 조직 활동도 없다. 외국기업에서 그들은 “지하당”이다. --- p.575

“신매판”을 하나의 계층이라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토론이 필요하다. 그들 중간에 일부 사람은 기술자·노무자·기업 관리인 등 다른 서열 속에 편입시켜 넣을 수 있다. 기술자·관리인·노무자는 늘 어느 기업에서든지 고용되며, 단지 고용주가 다를 뿐이다. 그들은 외국기업에 고용되어졌을 뿐이다. 경제가 글로벌화 함에 따라서 국가 간의 경제 상호 보완성이 나날이 강화되어지고, 경제 교류도 나날이 빈번해졌다. 이 한 나라의 판매자가 다른 국가에 고용인이 있고, 또 다른 국가의 기업은 그 국가에도 고용인이 있다. 외국기업은 중국에서 중국인을 고용하고, 중국기업도 국외에서 외국인을 고용한다. 국가 상호간의 고용 또한 늘 있는 일이며,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만약에 그들을 아직 “신매판”이라고 부른다면, 그들은 뒤를 계승할 사람이 없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강대하게 발전할 것이다. --- p.586

중국은 과거에는 범죄 통계자료를 공포하지 않았고, 1987년에서야 해마다 공포하기 시작했으며, 아울러 과거 범죄자료 통계를 보충 공포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일부 지방의 공안기관은 입건 수를 축소했다. 관련 분석에 따르면, 일부 공안기관의 입건 수는 단지 실제 발생한 사건 수의 40~5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캉수화(康樹華), 1997] 일부 지방의 기관은 어느 사건에 대해 “해결을 못하면 통계에 넣지 않고, 심지어는 해결을 했음에도 통계에 넣지 않았다.” 물론 입건이 되지 않은 대다수는 작은 사건으로, 중대형의 사건 수는 그래도 비교적 정확한 편이다. 1990년대 이래로, 통계된 사건 중 중대형 사건의 비율이 대폭 상승했다. 통상적인 통계에 따르면, 심각한 범죄사건은 일반적으로 전체 범죄사건의 15~20%를 차지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래로, 이 비율은 46% 이상에 이르렀으며, 살인·강도·사기·밀수·마약 등 심각한 범죄사건이 대폭 상승했다. --- p.595

합법적인 정식의 조직범죄가 근래에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산둥 타이안(泰安) 시 위원회·시 정부 주요 지도자가 대표로 있는 범죄 집단, 잔장(湛江) 시 위원회·시정부 주요 지도자가 대표로 있는 조직집단, 난징 공전국(供電局) 주요 지도자가 대표로 있는 조직집단, 안산(鞍山) 시의 모마(慕馬)집단 등이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적지 않은 성과 시에서 성 1급 고위층 지도자가 대표로 있는 조직집단이 밝혀졌다. 2004년에 폭로된 헤이룽장 성 위원회 사건은 성 정치협상회의 주석 한구이즈(韓桂芝)·성장 톈펑산(田鳳山) 및 5명의 부성장급 고위관리·10여 명의 지역 관리가 서로 결탁되고 얽혀 있는 거대한 네트워크 식의 범죄집단을 결성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한 지역·한 부서의 당과 정부 지도자 집단이 진행한 조직범죄이다. 예를 들어 집단밀수·집단횡령과 수뢰·집단부패 등이 있다. 그들은 기존의 당정 조직을 이용하고, 국가가 부여한 행정 권력을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범죄 활동을 했다. 일단 적발하여 체포하면, 전체 당과 정부 지도자 집단 전체 구성원이 거의 모두 범죄자이다. 예를 들어 난징 공전국 12명의 지도자들이 줄지어 감옥에 들어갔다. 20세기 말에 폭로된 상황을 보면, 합법조직을 이용한 집단범죄 상황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중국 조직범죄의 주된 형태이며, 또한 영향력이 크고, 가장 해가 되는 형태이다. 합법적인 정식 범죄의 증가는 이 조직에 대한 군중들의 믿음을 사라지게 하며, 장기적으로 이어지게 되면, 이 합법적인 조직은 군중의 마음속에 합법성을 잃게 될 것이다. --- p.619

개혁 개방 이래로 농민은 분화 중에 있다. 농촌에선 향진 기업 노동자·향진 기업 관리간부·개인 상공업주·농촌 지식인(교사·농업기술인 등 포함) 등등 다양하게 사회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출현했다. 그중 일부 역할은 이미 농민이 아니라, 도시와 상응하는 역할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다. 예를 들면 향진 기업 노동자와 도시의 노동자, 도시와 농촌의 사유기업주는 수입의 출처와 생활방식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이처럼 도시와 농촌이 가까운 계층은 하나로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유기업주는 도시와 농촌 양쪽에 모두 포함된다. 일이 비교적 고정적인 향진 기업 노동자도 노동자 계층에 편입시킬 수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 그들과 농업 노동자를 비교하면 결국은 소수에 불과하다. “농업 호구”와 ”비농업 호구” 두 종류의 신분은 아직도 존재하며, 2억여 명의 농민공은 여전히 농민 신분이다. --- p.646

정치권력은 선천적으로 확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잠식하기 쉽다. 정치권력 앞에서 연약한 개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며, 단지 사회 권력으로 정치권력을 제어해야 효과가 있다. 그렇지만 시민사회가 존재하고, 국가·사회가 이원화되어야 정치권력을 제어하는 사회권력이 형성될 수 있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민주의 기초이고,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하게 하는 필요 존재이다. 오랫동안 정치의 막강한 권력은 나약한 개인의 권리를 말살했고, 시민사회는 완전히 정치 국가에 의해 통째로 빼앗겼다. 20∼30년의 개혁을 거치면서 중국은 수천 년 동안 형성된 고도로 통일되고 경직화된 모식이 느슨해지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하나로 합쳐진 전통적인 구조가 해체되고 있으며, 국가·사회 이원화 구조를 향해 넘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적 의미의 중국 시민사회가 성장 중에 있다. 개인경제의 발전, 중간계층의 강대, 정부 기능의 축소, 사회 중개 기관의 발전은 시민사회 생산과 발전의 중요한 조건이다. --- p.654

1978년 이후의 경제체제 개혁은 사회발전의 지도방침·경제 관리 모델·경제 정책에 모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것은 고유의 계층 구조에 거대하고 깊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사유기업주라는 새로운 계층이 출현했을 뿐만 아니라, 고유의 각 계층에 모두 분화와 재편성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되어 여러 해 동안 없었던 거대한 규모의 사회계층 유동이 나타났다. 30년 개혁 개방은 전반부 15년 동안은 후천적 요소가 사회 유동에 대해 중요한 작용을 했고, 후반부 15년 동안은 선천적인 요소가 사회 유동에 대해 작용이 갈수록 커졌다. --- p.665

사회 안정의 버팀목이 다원화된 이후, 사회 안정을 결정하는 관건은 각 계층의 화합으로, 각 계층의 질서 있는 행위와 개인의 이성적인 행위에 있었다. 정부의 주요 작용은 통제에 있는 게 아니라, 협조와 규범에 있다. 정부는 각 계층 간의 이익을 조화롭게 해야 하고, 각종 조건들을 만들어 각 계층이 서로 소통·협의·타협하게 해야 한다. 정부는 시장을 규범화하여 공평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고, 아울러 시장에서 효력을 잃은 부분과 상황에서 정부의 작용을 드러내야 한다. 그중, 사회 공평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다. 경제 개방 이후, 사회구조의 개방을 추진하는 데 노력하려 했다. 사회구조가 개방되어야만, 사회의 신생 역량을 흡수할 수 있고, 새로 출현하는 사회 배역들로 하여금 자기의 합법적인 위치와 이익을 보장받도록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리 상태를 안정시키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한다. 사유기업주 계층이 출현한 이후, 10년의 과정을 거쳐서 그들에게 합법적인 평등한 지위가 주어졌지만(1999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비로소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 구성 부분임이 확인되었다), 다른 새로운 사회 배역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농민공의 상황이 가장 심각하다. --- p.726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에 생산요소 자본화와 노동력 고용화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장경제조건 하에서는 자본이 항상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여, 고급 엔지니어로부터 일반 생산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본 고용의 노동자였다. 일부 “지식형 노동자”라고 자랑하는 엔지니어들은 경제 한파 속에서 “자본가”에 의해 해고되어 밥그릇을 잃어버렸으며, 일반 노동자는 항상 손해를 봤다. 이익 최대화를 추구하기 위해, 자본은 늘 온갖 방법으로 기업 바깥의 이익을 빼앗고 손해를 끼친다. 삼폐(폐기가스·폐수·폐기물) 난무·대기오염·환경파괴는 바로 자본이 위력을 떨친 결과이다. 자본이 권력과 여론을 매수하여, 자본원칙으로 정치원칙과 도덕원칙을 대체했다. 사회평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각종 원칙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부패되고, “관행”이 “규칙”을 광범위하게 대체했다. 자본원칙이 사회생활의 여러 방면에 들어와서, 차가운 금전관계가 인정의 따뜻함을 대체했다. --- p.741

현대 민주제도 역시 자본을 통제하는 비교적 효과적인 제도이다. 현대 민주제도는 노동과 자본이 수백 차례의 선택과 시행을 거치면서 만들어졌고, 사회적으로 실천되는 과정에서 수백 차례 시행착오를 거쳤다. 오늘날 민주국가에서 노동자들의 담판 지위가 중국 노동자의 담판 지위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가 중국만의 특색이 있는 민주정치를 세울 때, 마땅히 해외의 성공적인 경험을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화 과정을 가속화하는 데에는 정치적 개혁이 필요하다. 가령 자발적인 주동적 개혁이 없으면, 사회적 모순이 끊임없이 쌓이게 되어, 결국에는 폭발성의 급변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개혁은 적극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하여, 민주화 과정을 추진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집권 집단이 민주정치의 방향을 견지하고, 적극적·주동적·자각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민간 역량의 적극적 추진력과 집권 집단의 주동적 개혁이 상호 촉진하고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다음 개혁의 동력 모델일 것이다.
--- p.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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