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시장경제는 국가의 경제 개입을 가능하면 최소화하려는 것이지만 현재 자유 시장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미국 외에는 국가가 어느 정도 시장에 개입하는 혼합경제를 채택한 나라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혼합경제에서는 국영기업의 수가 많고 도로, 항만, 교육, 금융, 통신 같은 사회 인프라를 국가가 건설, 관리하며 의료보험이나 연금보험 같은 사회보장제도도 국가가 관장한다. 한마디로 말해 국가의 규제, 개입이 늘어나 경제 전체에서 정부의 입김이 많아지는 것이 혼합경제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 사회주의의 타협이라 할 수 있다.
--- p.36,「자유 시장경제」중에서
자본주의의 큰 특징 중 하나인 대량생산의 전제 조건은 생산의 기계화 그리고 제품이나 부품의 표준화다. 예전에는 인간 노동의 가치를 중시한 장인들이 기계화?표준화를 거부했고, 소비자는 자신만의 맞춤형 제품을 선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기계화와 표준화가 가속화되었고, 대량생산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다. 분업을 가능하게 하는 조립 라인의 도입 또한 대량생산을 퍼지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대량생산은 특히 산업 혁명 이후 커다란 경제적인 효과를 낳았다. 헨리 포드는 대량생산 방식을 체계적으로 도입하여 사업적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량생산’이라는 용어 역시 1926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포드사를 설명하는 글에 등장하면서 대중화되었다.
--- p.45,「대량생산」중에서
‘잉여’ 혹은 ‘이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이것이 ‘착취’의 다른 얼굴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본을 움직이는 동력이 바로 ‘잉여’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어찌 보면 ‘여유’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자신의 시간을 단지 일하는 데에만 쏟아부으면 잠시 생산성이 올라갈 수는 있으나 이내 체력과 정력이 고갈된다. 여유 시간이 있어야 재충전을 하고 또 한 단계 점프할 수 있다. 기업도 아슬아슬하게 적자를 모면하느라 분주하기만 하다면 연구개발이나 재투자, 신상품 개발을 할 수 없다. 직원들의 창의성을 고취시킬 여유도 없다. 또 외부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작품을 구입할 수도 없고 후원할 수도 없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문화예술 수준을 올릴 수도 없다. 18~19세기 천재적인 예술가가 많이 배출된 것도 그들을 후원하는 왕과 귀족,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잉여는 이와 같이 문화예술, 과학기술, 인문학 등 인류 지식과 지혜, 교양을 높이는 데 필요하다.
--- pp.57-58,「잉여」중에서
독점에 따른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업가라면 한번쯤 꿈꾸는 것이 바로 시장 ‘독점’이다. 이를 통해서만이 빠르게 부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상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쥔 사람들은 모두 그 분야의 시장을 선점하여 오랫동안 독점을 행사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독점은 보통 특허를 동반하기 때문에 특허 기간 동안은 경쟁자 없이 자유롭게 독점을 행사할 수 있으며 시장도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밖에 경쟁사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아이디어와 제품력, 마케팅력으로 그 분야의 경쟁자들을 초토화시키는 경우, 이 또한 독점과 유사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를 일컬어 카테고리 킬러라고 한다. 한국의 가구산업을 흔들고 있는 가구공룡 이케아, 아이폰으로 초기 스마트폰 시장을 거의 독점한 애플이 바로 이런 경우다.
--- pp.100-101,「독점」중에서
이러한 기계 파괴 운동은 노동자들이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서 발생하기도 했지만, 공장의 열악한 상황과 낮은 임금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일어나기도 했다. 러다이트 운동의 원인을 오로지 기계에 대한 공포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논리다. 러다이트 운동에서 유래한 ‘러다이트 오류’라는 말도 있다. 러다이트 운동에서처럼 기술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면, 그동안 기술 발전으로 생산성이 엄청나게 향상하여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를 빼앗겼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러다이트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타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기술 발달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 가서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 pp.105-106,「러다이트 운동」중에서
활판 인쇄술은 지식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국왕, 귀족, 사제, 대학 교수만이 서적을 볼 수 있었다. 사제들은 일반인들이 성경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성당에 와서 그들의 설교를 듣도록 함으로써 문맹률이 계속 높게 유지되도록 했다. 일반인들이 문자를 알고 개화되면 통치하기가 매우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450년경이 되자 이러한 지식 독점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활판 인쇄술이 개발되어 책이 대량으로 유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가격이 비싸고 구하기 힘들어 성직자와 지식인만 읽을 수 있던 성서가 대중화되었고, 다른 책들도 대량으로 인쇄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455년 구텐베르크가 활자 인쇄술로 성경을 180부 인쇄한 후 다양한 책들이 연달아 나왔고, 이로 인해 15세기 르네상스, 16세기 종교 혁명, 17세기 과학 혁명, 18세기 계몽 시대가 전개될 수 있었다.
--- p.149,「인쇄 혁명」중에서
철도 회사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현대화된 기업체를 구축해야 했다. 철도를 유지 관리할 기술자,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장, 다른 역과 통신으로 공조해야 하는 역장, 고객에게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을 뽑고 통제하고 교육시키는 조직 체계가 필요했다. 역장이 각 역을 책임지고 운영하도록 하는 것은 전문 경영인을 양성하는 것과 같았다. 또 경험이 많은 기존 직원을 우선적으로 승진시키는 연공 서열 제도도 철도 회사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철도 회사는 현대적 기업 체제를 만드는 데 기여했고, 효율적 관리 기법은 철강업 같은 다른 산업을 체계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 마디로 19세기 말 가장 선진적인 산업은 바로 철도 산업이었다.
--- pp.246-247,「철도」중에서
이처럼 럭셔리 상품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자신의 저서 《사치와 자본주의》에서 현대적 개념의 럭셔리 시장은 중세 말기에 왕들과 부유한 성직자들이 집을 장식하기 위해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품 외에도 14~15세기 피렌체에서는 가죽을 다루는 무두장이, 금세공사, 실크 제조자 같은 길드 장인, 도공들이 있었고, 안트베르펜에는 다이아몬드 세공사들이 있어서 부유층에게 납품하곤 했다. 17세기 들어와 루이 14세 시대에 콜베르 재정 총감은 왕과 귀족들을 위한 럭셔리 상품의 제조를 위해 장인들을 적극 후원했고,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에서는 황제와 부르주아지 계층을 위한 향수, 여행트렁크, 시계, 보석들이 속속 등장했다.
--- pp.260-261,「럭셔리」중에서
부시코는 백화점 건물을 마치 궁전이나 오페라 극장, 대성당처럼 꾸몄고, 건물 내부도 화려하게 장식했다. 봉 마르셰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상관행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부티크 같은 고급 상점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것에 반해 백화점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또 흥정에 의해 가격이 달라지지 않고 미리 정한 가격에 파는 정가제를 채택했다. 정가제이긴 했지만, 부티크 같은 고급 상점보다는 상품 가격이 저렴했다. 게다가 때때로 할인 판매를 하여 고객이 더욱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살 수 있도록 했다. 손님은 상품을 직접 만져보고 고를 수 있었고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을 할 수도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 안에 상품을 전시하여 지나가는 행인이 볼 수 있도록 했고, 행인에게 광고지도 나눠주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백화점에 올 수 없는 고객을 위해 우편으로 상품을 팔기도 했다. 봉 마르셰에는 독서실이나 그림 전시장도 있었고, 정기적으로 클래식 콘서트가 열렸다. 단지 상품만 파는 곳이 아니라 쾌적한 문화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혁신적인 판매 기법을 도입한 봉 마르셰의 인기는 치솟았다
--- pp.267-268,「백화점」중에서
플라스틱이라는 기적의 신소재가 나오기 전에, 인류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만을 가지고 물건을 만들어야 했다. 모든 그릇은 흙으로 구웠거나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아니면 유리, 청동 혹은 쇠로 만들었다. 가구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하나 만드는 데 온종일 걸리거나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흙과 나무, 돌이나 쇠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그나마 고무의 쓰임새를 알아내 탄력성 있는 바퀴를 만들게 되었다. 고무만 해도 대단한 신소재였던 셈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루는 물건들의 절반 이상을 구성하고 있는 플라스틱의 발명과 거기에서 비롯된 소재 혁명은 진정한 대량생산 시대를 가능케 한 핵심 동인이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주 사용 도구에 따라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등으로 나눈 것에 빗대어, 현대를 ‘플라스틱 시대’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플라스틱이 없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품 중 상당수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페트병, 비닐봉지, 단추, 나일론, 테플론, 당구공, 스타킹, 자동차 내장재까지 우리 주변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라스틱이 없다면 요즘 뜨고 있는 3D 프린터도 아무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플라스틱의 종류는 이처럼 매우 다양하고, 그 용도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 p.278,「플라스틱」중에서
사람이 모이면 시장이 서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런던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1700년 당시 런던에는 커피하우스가 무려 2,000개를 넘었다. 커피하우스마다 제각기 관심이 유사한 사람들끼리 모이면서 다양한 비즈니스의 싹이 텄다. 런던 조나단 커피하우스는 나중에 런던 증권거래소가 되었고,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로이즈 보험회사로, 발틱 커피하우스는 런던 해운거래소로, 예루살렘 커피하우스는 동인도 회사로 발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는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웨이터waiter라고 불렀는데, 이것만으로도 증권 거래소가 웨이터가 일하던 커피하우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커피하우스가 시장을 형성하는 현상은 미국에서도 예외 없이 발생했다. 미국 보스턴의 머천트 커피하우스에서 최초로 주식 경매가 이루어졌고, 뉴욕 월 가의 톤틴 커피하우스는 뉴욕 증권 거래소로 발전했다.
--- p.299,「커피」중에서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귀족이나 영주, 기사, 농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맡기를 꺼리는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배척당할지 몰랐던 그들은 그중에서도 아무 데서나 정착해 먹고 살 수 있도록 항상 자신의 머리를 활용하는 직업을 택했다. 물건이나 농산물을 직접 생산하는 것보다는 물품을 유통시키는 행상인, 무역업자, 배급업자와 같은 직업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대의 유대인들은 물리적 체력을 바탕으로 한 단순 노동보다는 두뇌를 쓰는 변호사, 교수, 의사, 금융인, 공증인, 회계사, 기자 같은 전문 직종에 몸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 들어 유대인들이 주로 종사하는 직종이 점차 각광을 받게 되면서, 유대인의 파워는 더욱 커졌다.
--- pp.316-317,「유대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