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의 불가침 조약
33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스)이 정권을 잡자 히틀러는 놀랍게도 먼저 폴란드와의 우호정책을 시도했고, 실제 다음 해 1월 26일, 10년 기한의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지금 보면 놀랍지만, 당시 피우수트스키는 히틀러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었다. 히틀러는 적어도 ‘교적상’으로는 같은 가톨릭 신자였고, 프로이센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오스트리아가 폴란드인에 대해 관용적이었던 덕에 피우수트스키는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도 폴란드를 두렵게 하는 독일의 정치적 전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본 것이 당연했다.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역시 소련이다. 우리는 이 불가침조약이 단지 독소전쟁을 개전하기 전 서부전선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미 그 전에 불가침조약을 맺은 일이 있었다?
바로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첫 불가침조약을 맺은 당사자이며, 독소불가침조약이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히틀러는 이렇게 합리적인 모습을 위장하면서 시작했고, 그 가면을 벗어던진 후에도 또 한 번 소련이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눈 속의 기적
독립전쟁의 참전 용사로서 예비역 대령이자 제지업과 양조업으로 성공한 파보 탈벨라가 만네르하임을 만나 핀란드군의 패주를 비난한 다음 이렇게 계속 밀려 라도가 호수 북쪽까지 내준다면 만네르하임 선 후방이 공격당하게 될 것이라고 만네르하임을 몰아세웠다. 오만하고 귀족적인 만네르하임이었기에 배석한 발덴 장군은 긴장했지만 놀랍게도 만네르하임은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탈벨라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사령부 직속 예비대까지 내주었다. 정확하게는 제16보병연대와 야전보충여단의 3개 대대였다. 라도가 호수 북쪽을 맡게 된 탈벨라가 상대할 부대는 전차 45대의 지원을 받는 제139사단이었다. 12월 8일, 소련군이 톨바야르비 호숫가에 숙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탈벨라 대령은 '워낙 침체된 부하들의 사기를 약간이라도 살려주기 위해' 수오미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스키를 탄 대대 병력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기습을 명령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소규모 기습이 큰 전과를 거두었다. -본문에서
단지 침체된 부하들의 사기를 약간이나마 살려주기 위해 시도된 이 작은 기습작전, 이것이 바로 소부대가 대부대를 토막 내 각개격파하는 모티 전술의 시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약소국 핀란드는 인구도, 장비도, 병력에서까지 모든 면에서 뒤처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땅을 지킨다는 신념과 자신들의 땅에 가장 익숙한 전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전사들이 눈을 뜨자, 쉽사리 이길 수 없을 듯했던 거대한 적도 마치 전설 속의 용사들이 거대한 용을 물리치듯, 차례차례 공략하여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막대한 전과와 능력을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타란토 기습
…이탈리아 해군이 푼타스틸로 해전 이후 틀어박혀 있자 영국함대는 초조해졌다. 이때 승진해서 지중해 함대의 항공모함 전대를 지휘하던 리스터 소장은 참모회의에서 함재기를 사용한 타란토 공격을 함대 사령관 커닝햄 제독에 제안하였는데, 생소한 공격법이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 채택되었다.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Illustrious)와 이글(Eagle)의 함재기를 이용한 타란토 공습 계획이 리스터 소장에 맡겨졌다… -본문에서
로마시대부터 유명한 군항이었던 타란토 항. 비록 골목대장 수준이었지만 지중해에서만큼은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던 이탈리아 해군이 알렉산드리아에 버티고 있던 영국의 지중해 함대를 위협하기 위해 전력을 집결시켰던 군항이었다.
지중해를 자신들의 내해로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함대가 내린 결단, 그리고 공습으로 불타오르는 타란토 항과 이탈리아의 함대는 해전의 방향을 바꾸는 중대한 전투로 기록된다.
세계 해전사의 방향을 바꿨다는 거창한 평가를 받았지만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 전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바로 12월 7일이 증명해주고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