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금지된 주제에 대한 연구를 감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몰이해에 맞설 용기를 갖추어야만 하는 법이다. 그녀가 임박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그 나날들은? 이고르 박사는 이 문제를 두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는 전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하나의 기적처럼 여길 것이다-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삶의 매순간에 예기치 못한 사고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칠 모든 가능성들을 고려해볼 때,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 p.257
직장에서 바로, 바에서 남자친구의 침대로, 침대에서 자신의 방으로, 자신의 방에서 엄마의 집으로,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틀에 박힌 생활을 해온 그녀가 지금 정신병원이라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공간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 p.54
이제 위장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몹시 고통스러웠다.
'이상도 하지.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곧장 잠들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귓속이 윙윙거리고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그뿐이었다.
'토해버리면 죽지 않을 거야.'
그녀는 복통을 잊기 위해, 삽시간에 지상에 내려앉는 어둠에, 볼리비아 악사들에게, 집에 돌아가기 위해 가게문을 닫고 있는 상인들에게 집중하려 안간힘을 썼다. 귓속의 윙윙거림은 점점 더 날카로와졌다. 알약들을 삼킨 이래 처음으로, 베로니카는 두려움을, 미지에 대한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잠시였다. 그녀는 곧 의식을 잃었다.
--- p.20
약간만 지혜롭게 행동하고 일상생활의 도전에 맞설 수만 있다면, 밖에서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통제된 광기'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 위에서 자신의 정신이 그 모든 어려움을 비웃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세상 모든 정상적인 인간들처럼 울 수도, 근심에 빠질 수도 화를 낼 수도 있었다.
--- p.본문 중에서
베로니카의 존재는 이곳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다시 생각하기 가했다. '형제클럽'이ㅡ 한 모임에서, 누군가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설명을 시도 했다. 빌레트에서 죽음은 아무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갑작스레, 혹은 오랜 투병생활 끝에 마치 축복이 내리 듯 찾아 왔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경우는 드라마틱 했다. 그녀는 아직 젊고 다시 살고 싶어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잇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겐 삶의 기회가 있어. 과연 나는 그 기회를 꽉 붙들고 있는 걸까?'
--- p.141
'무슨 일이야?'
베로니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아니, 기적이야. 하루를 또 살 수 있어.'
에뒤아르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P.251
'빌레트의 건물들 너머, 더 먼곳을 바라봐야 해.'
'그럼 그렇게 해.'
에뒤아르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병실의 벽 쪽도 환자들이 말없이 거닐고 있는 정원 쪽도 아닌, 다른 대륙, 가뭄과 억수 같은 비가 번갈아 이어지는 어떤 나라의 한 거리를 향해.---P.214
--- p.
네가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면,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죽어. 넌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 미래와 과거와 관련된 많은 것들이 걸려 있어서 감히 사랑에 빠져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아. 네 경우엔, 존재하는 건 오직 현재 뿐이야. -202-
그 아이 때문이야. 우린 이미 이 병원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수도 없이 봤어.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대개 모든 희망을 잃은 후에 죽어들 갔지. 그런데 처음으로 앞날이 창창한 젊고 에쁘고 건강해 보이는 아이한테 그 일이 닥친 거야. 베로니카는 유일하게 영원히 빌레트에 머물길 원치 않는 아이일 거야. 그때문에 우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었지. '그럼 우린, 우린 여기서 뭘 찾고 있는 거지?'라고 말야. -187-
--- p.187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죠?'
간호사가 주사를 놓는 사이 베로니카가 반복해 물었다.
'스물 네시간,어쩌면 그 이하'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끝내 참아냈다.
'두가지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해요. 하나는, 내가 깨어있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일분 일분을 즐길수 있도록 약이든 주사든 무엇이든 주세요. 잠이 쏟아지지만 난 자고 싶지 않아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내 삶이 영원하다고 믿었을 때 항상 나중으로 미루어 왔던 것들요. 내 삶이 살아볼 만한 가치가 없다고 믿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내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들요'
--- p.173-174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효모균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한다. '사랑을, 그리고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효모균이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는지, 후회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다른 세균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그는 짝과 더불어 죽음으로 한정된, 그래서 가치를 가지는 삶을 살았다. 임종의 순간, 그는 각기 다르게 생긴 자식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눈을 그윽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몫의 선택을 통해 너희들에게 삶과 죽음을 동시에 주었다. 좋건 싫건, 이젠 너희들도 너희 몫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 p.260
'개개의 인간은 모두 유일해요. 자기 자신만의 자질, 본능, 쾌락의 형태, 모험을 추구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사회는 집단적인 행동 양식을 강요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되죠. 그들은 그걸 받아들여요. 타자수들이 아제르티 자판이 최선의 자판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듯이, 시계바늘이 왜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세요?'
--- p.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