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도서 담당 유서영 (berrius@yes24.com)
‘A Little Life’는 2015년 전미도서상과 맨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던 작품으로 8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 소설이다. 뉴욕 맨해튼에 사는 네 친구들 윌렘, 주드, 말콤, JB 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인 하냐 야나기하라는 하와이에 뿌리를 둔 일본계 미국인으로 인종과 계층, 행복과 불행을 넘나드는 삶의 다양한 층위를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혹독하게 그려낸다. 주인공들의 삶을 예고하는 듯 청년의 잔뜩 찌푸린 표정을 실은 표지는 인터넷에서 각종 패러디를 낳으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물 몇 살 그들은 별로다 하면서도 습관처럼 오게 되는 동네 식당에 모여 있다. 말콤은 으레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양보다 많이 시키고 항상 배가 고픈 윌렘과 주드는 말콤이 먹지 못한 음식을 슬금슬금 깨끗이 비운다. JB는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시끄럽다. 윌렘과 주드는 맨해튼의 구석 골목에 가난한 학생 형편에 딱 맞는 집을 구한다. 풍족하게 자란 말콤과 JB가 보기엔 집이라고 부르기 뭣한 곳이었지만 살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윌렘과 주드에게는 부모님이 없다. 말콤은 부모님, JB는 엄마,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윌렘은 백인이고 주드는 인종을 알 수 없는 외모, 말콤은 흑인과 백인의 혼혈, JB는 아이티계 ‘정통 흑인’이다. 이들의 삶, 성격, 가정사는 인종만큼이나 제각각으로 펼쳐진다.
말콤은 종종 친구들의 결핍이 부럽다. 주드와 윌렘이 작은 것들에, 그에겐 어렸을 때부터 당연했던 것들에 기뻐할 때 마다 나이가 들어도 날마다 새로운 기쁨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생각한다. 흑인 아버지의 인생은 거의 모든 행보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훌륭한 부모님과 똑똑한 사촌을 보면 주눅이 들곤 했다. 졸업 후 부유한 친구들과 함께 건축사 사무소를 차리지 않고 굳이 내키지 않은 취직을 한 것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님들이 있는 저녁자리에서 아버지가 ‘아들 놈이 내 도움 없이 회사에 들어갔다’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였다.
윌렘은 브로드웨이 주변 식당에서 일하는 수많은 웨이터들처럼 훤칠한 배우 지망생이다. 덴마크를 떠나 이민자로 살아온 그의 부모는 미국 중부에 자리를 잡은 무뚝뚝한 농부였다. 첫째 아이를 태어나자마자 잃고 둘째 아이 마저 장애를 갖고 태어나자 셋째인 윌렘에게는 어떠한 애정도 기대도 주지 않았다. 자식에게 해야 할 기본적인 도리만 지켰던 부모와 달리 그는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형을 사랑했고 떠나기 전까지 진심을 다해 보살폈다. 때로 그는 다정이 지나쳐 주변 사람에게 뒷통수를 맞고 중요한 배역을 뺏겨도 그들이 잘 했기 때문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거친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야망 대신 성실함만 가진 그에게 꿈은 저 멀리 있는 것만 같다.
아기 주드는 약국 앞 쓰레기통 속 아니면 그 옆에서 발견되었다. 수도원에 보내진 아기는 궁금증과 소유욕 같은 당연한 본능과 욕망을 가진 소년으로 자랐고 형제들은 자신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주드에게 멸시를 던진다. 이해와 설명 대신 엄격한 규율만 존재하는 폐쇄된 수도원에서 그의 사소한 욕망이 죄에 이르도록 커지는 순간 형제들은 그에게 벌을 내리고 벌은 곧 학대로 변한다. 소년 주드는 함부로 다뤄지고 성적으로 소모 당한 채 껍데기가 되어간다. 그를 구원해줄 것 같던 이 조차도 다른 형제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른 주드는 남몰래 팔뚝에 면도칼을 긋는 버릇이 있다. 과거의 일로 불구의 다리를 갖게 된 자신을 견딜 수 없을 때 마다, 겨우 얻게 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을 것 같다고 느낄 때 마다 자해로 스스로를 확인한다. 가끔은 너무 깊게 상처를 내는 바람에 대학 시절 친구인 소아과 의사 앤디의 도움을 받는다. 부모나 가족, 어린 시절 등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 주드에게 친구들은 그가 원하는 거리를 지켜준다. 한 여름에도 긴 팔만 입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어느 날 그런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티스트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JB는 이런 저런 노력에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친구들의 일상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친구들의 사진은 그의 붓 끝에서 여러 겹 물감으로 캔버스 위에 생생히 살아난다. 그가 그린 주드는 특히 아름다웠고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탐낼 만큼. 피사체인 주드는 발작 후 지친 모습으로 힘겹게 누워있다. 그 누구에게도, 스물이 넘어 처음 갖게 된 친구들에게 조차 가장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은 예술이라는 꿈 속에서 적나라하게 전시된다.
노출된 이미지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조차 환상을 품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잔인함은 자기 손에 들어온 환상이 현실을 드러내자 상대방을 짓밟아 버리는 못된 화풀이를 하게 만든다. 사실 부숴야 할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임에도 불구하고. 주드, 그는 너무도 불행했다. 그는 행복해도 괜찮다. 이대로 무너지기에 그는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불행한 시절을 뒤늦게 보상하듯 주변 사람들은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그를 창조한 작가는 빼앗아 간 것들을 돌려주었지만 애써 얻은 것들은 쉽게도 부서졌다.
희망을 꿈꾸던 이들에게 찾아온 절망, 그 끝에 다시 희망이 있기를. 창조주여 그를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