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모더니스트 혹은 모더니즘 건축가, 정기용
건축 비평가 이종건이 말하는 정기용이라는 건축가는 이런 사람이다. 우리의 60대 건축가 세대로는 거의 독보적인 유학파 엘리트이며 동시에 대중 매체와 가장 넓은 접면을 형성해 온 프랑스 특유의 사회주의적이고 좌파적 성향으로 정치 권력 바깥에서 타문화 간의 연대를 통해 정치 비판 세력의 일부로 살아왔다. 더불어 참여 정부의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으며 한국 건축 사회의 유일한 문화 권력이라 할 수 있었던 서울건축학교 집단 '안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생물학적 나이와 전혀 상관없는 엄청난 지적 호기심과 어린이 같은 천진무구의 낭만성과 청년의 열정을 지닌 따뜻한 건축가다.
"정기용이 자신의 건축을 '감응'이라는 말로 집약하는 것은, 그런 시각에서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따르면, "조금씩 제한된 범위에서" 사회적 변혁이 가능한데, 그것이 어려운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나라 모든 사람이 건축과 공간에 관해 잘못된 고장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모든 사람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힘이 미치는 한계 안에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그가 믿는 것은, 바로 '감응' 때문이다." --- pp.119-120
스티브 잡스로 읽어 보는 작금의 건축의 향방은?
이종건 교수가 보는 스티브 잡스는 에디슨이나 포드와 달리 어떤 것도 창안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잡스는 필요로 하는 아이디어들을 도용하거나 남들보다 더 잘 이용해서 자신의 사업에서 엄청나게 성공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도스라는 시스템 언어로 키보드를 이용해 조작하던 피시 컴퓨터와 달리 마우스로 화면의 아이콘을 조작해 사용자들이 컴퓨터를 편하고 쉽게 쓸 수 있게 해 줌으로써 획기적인 성공을 일군 애플 컴퓨터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는 거칠게 말해 제록스의 아이디어를 훔친 결과다. 그런데 디자인과 예술 영역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건축가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잡스가 사업적으로 성공하게 된 결정적 요인의 하나가 바로 잡스의 컴퓨터 엔지니어링 기술이 아니라 디자이너 혹은 예술가로서 잡스의 안목과 감수성이라는 사실이다. 잡스는 이미 존재해 있는 아이디어를 남들보다 빨리 낚아채고 그것을 기존의 기술에 접목해 현실화했을 뿐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잡스가 인간과 기술 간의 인터페이스를 훌륭하게, 그러니까 기술을 매개로 인간이 욕망하는 바를 가장 잘 상품화했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거기에 디자인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든 잡스는, 세상이 온통 눈을 돌리고 한 시대를 천재적으로 살아 낸 시대의 걸물로 칭송되고 있으니,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후기 자본주의 글로벌리즘 세상에서, 도무지 향방 잡기 어려운 작금의 건축의 길을 읽어 낼 만한 매개로 삼아 문제될 게 없겠다. 순전히 그의 성공기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시대의 건축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마땅하다." --- p.165
건축이냐 삶이냐?
건축이냐 삶이냐? 하는 물음은 현대 건축의, 건축을 하는 우리의 건축적 아버지이자 현대 건축에 있어 불멸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던졌던 질문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비해, 구차한 질문이라고 저자 이종건은 말한다. 이 문제는 68혁명 이후 일상의 사소한 것들로 관심을 옮긴 지적이고 문화적인 도도한 흐름과 상관없이, 지금 이 땅에서 건축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이 당면한 실존의 성격을 띤다. 그래서 저자는 내일이 되어도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질 예감밖에 없는 시대에서 어떻게 건축을 포기할 수 있냐는 둥, 건축의 열정을 회복하라는 둥, 좀 더 견뎌 보라는 둥, 많이 지치고 힘들거든 잠시 여행을 떠나든 좀 쉬든 한 후에 다시 생각해 보라는 둥의 충고를 건축에 관계된 누구에게도 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건축은 건축 안에서만 대단하게 보일 뿐, 그것을 벗어나면 그저 다종다양한 활동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건축이 혁명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가의 주장은, 부분 집합이 그것을 포함하는 집합을 포함한다고 믿은 착각이거나 자기세뇌에서 비롯한 과대 망상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건축가의 미련으로 힘들다면, "후기 자본주의 조건 하에서는 진실로 가치 있는 건축이 실현될 수 없다는, 아마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래서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으로, "글을 쓰지 않는 작가, 침묵하는 음악가, 짓지 않는 건축가"에 매혹되었던 시대의 지성 타푸리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그의 말처럼 "오늘날 건축이라는 프로젝트 그 자체와 실현이 대기업의 손에 달렸"으니, 건축을 버림으로써 우리의 삶을 우리가 주재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지 않겠는가?"
--- p.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