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미테랑이라는 사람과 그의 활동에 관해 많은 의문이 대답 없이 남아 있다. 나는 이들 의문에 솔직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그는 정직했던가? 자신이 한 말을 믿었나? 자신의 과거를 속였나? 그는 대독 협력자였던가? 유대인 배척주의자였나? 자신의 질병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했나? 제왕처럼 처신했나? 그의 재임기간 끊이지 않은 ‘사건들’의 공모자였던가? 동유럽의 변화를 알았나? 독일 통일을 늦추려고 혈안이었나?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을 후원했나? 유고와 르완다의 비극에 책임이 있는가? 진정으로 사회주의 경험을 밀고 나가고 싶어 했나? 그의 공약을 배반했나? 민주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에 비록 부분적이라도 모범이 될 수 있는가? 프랑스는 그의 치세에서 얻은 것이 있나? 미래를 위해 어떤 교훈을 얻어낼 것인가?
--- 저자의 서문 중에서
긴장이 고조되어야 할 순간인 선거일 5월10일도 마찬가지로, 7년 전에 이미 겪은 하루가 되풀이되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선거운동의 주요 지휘자들이 모여 있었다. 조스팽ㆍ랑ㆍ킬레스ㆍ포프랑ㆍ파비위스ㆍ에스티에ㆍ모루아ㆍ베레고부아ㆍ뒤마 그리고 나. 전해에 죽은 조르주 다얀을 제외하면 1974년 5월부터 뚜렷한 확신은 없었지만 이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 아침 비에브르 가의 미테랑 집에 모였던 모든 사람이었다. 하나의 이상과 한 사람에 대한 믿음에 의해 모인 친구들의 무리가 최악의 상황에서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14%의 인플레이션, 150만 명의 실업자, 400억 프랑의 무역수지 적자, 투기 때문에 위협받는 화폐가치, 위기의 유럽, 냉전에 휘둘리는 국제정세, 그 어느 것도 희망을 주는 것이 없었다. --- Chapter 1 권력을 정복하다 중에서
그의 중요한 보좌관들은 봉사의 관점에서(그는 이것을 행정이라고 불렀다)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보고 선발한 주변인들이었다. 그는 지적 능력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보다 기질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독창성과 기발함, 창의성과 기이함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틀린 생각이라도 그에게 참신해 보이면 대다수가 인정하는 옳은 생각보다 그를 더욱 끌리게 만들었다. 그는 특히 고위 공무원들을 경계했다. ……
그는 권력이란 정치에 맛들인 사람에게 마약이며, 정치에 안주하는 사람을 타락시키고, 정치에 만족하는 사람을 파괴할 뿐 아니라 명망과 평판, 영예와 유명, 인정과 존경, 호기심과 경탄을 혼동하도록 부추긴다는 말을 즐겨 했다. 그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의심을 멈추게 하고, 모든 비판적 생각을 가시게 하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게 하고, 무언가 영속적인 담보, 즉 면책을 가졌다는 환상을 믿게 한다고 생각했다. --- Chapter 2 국가를 통치하다 중에서
당시 사회복지 부문에서의 불평등은 심각했다. 노동자의 절반은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70만 명의 봉급생활자는 한 해에 40번 이상 밤샘노동을 했다. 노동자 자녀들의 대학진학률은 4%에 불과했는데, 회사 중역의 자녀들은 4분의 3이나 대학에 진학했다. 4분의 1에 해당하는 젊은이가 전문기술교육을 받지 못하고 교육기관을 떠났다. 평균수명은 남자의 경우 70세였는데, 노동자들은 훨씬 낮았다. 그들은 대부분 퇴직하고 5년 안에 죽었다. 자기 진영에 속한 단체들을 포함한 많은 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테랑은 60세 정년제, 주 39시간 근무, 제5주째 유급휴가, 노동조건 개선, 세입자와 집주인의 균형적 관계 유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10년 유효 갱신가능 체류증명서 발급 등을 실행했다. 이는 많은 사람의 생활을 바꾸었다. 마침내 봉급생활자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
미테랑의 최대 관심사는 봉급자와 실업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구매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봉급인상이나 실업수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가상승 억제와 세금인하를 통해서였다. 그는 식료품에 대한 부가가치세 경감, 직업세 경감, 대규모 사업의 예산배정 제외를 결정했다. 세금을 낮추기 위해 사회보장기금, 공·사기업을 위한 재정지원의 다른 수입원을 찾기 위해 나섰다. --- Chapter 3 삶을 변화시키다 중에서
그가 보기에 미국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었다. 그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지리적으로 유럽에 한정된 미국과의 군사동맹이 공산권으로부터의 모든 공격적 의도에 맞서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유럽대륙 대부분의 사회민주당과 달리 그는 미군과 핵무기가 유럽에 주둔하는 것을 찬성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미국은 또한 매우 침략적이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강대국이었다. 미테랑은 많은 프랑스 사회당원이나 공산당원들과 달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잠수함에 탑재하는 전술핵무기를 조심스럽게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유럽이 단합하고 경제ㆍ정치ㆍ군사적 측면에서 점진적으로 세계적 세력이 되기 위해 프랑스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불ㆍ독 관계를 유지 강화해야만 했다. --- Chapter 4 프랑스를 지키다 중에서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미테랑은 많은 계획을 제안했다. 그 중 몇몇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럽이라는 건축물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들은 대규모 시장, 기술, 유럽의 확대, 통화, 방위, 사회복지 권리, 제도적 구조에 관한 것들이다. 매번 프랑스 대통령은 그것을 우선 프랑스와 독일의 계획이 되도록 했다. 그 다음 들로르 유럽집행위원장의 도움을 받아 그것들을 다른 회원국들에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게 ‘파는’ 데 성공했다.
--- Chapter 5 유럽을 건설하다 중에서
내가 일생의 일부를 바쳤고, 그 덕분에 내가 프랑스를 위해 봉사할 수 있었던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영웅은 완벽하지 못했다. 그는 전설 속 인물들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실망과 반발의 긴 시간이 지나고, 나는 꼭 필요한 증인들과 생각하고 공부하고 토론했다. 나의 생각이 다듬어졌다. 그는 분명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비시정권의 범죄 행위에는 전혀 손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 이데올로기에도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비시에서 주위의 순응주의와 지배적인 유대인 배척주의 그리고 모두 라발과 페탱을 모두 우러러보는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는 엄청난 명철함과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레지스탕스에 몸을 담는 것이 아직 적절한 처신으로 생각되지 않던 시절, 많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빨리 스물여섯 살에 그는 투철한 레지스탕이 되었다. --- Chapter 6 과거의 베일을 벗기다 중에서
1992년 여름 동안 병의 진전이 빨라졌다. 응급수술이 필요했다. 그는 버티려고 해보았다. “나에게 칼질을 하도록 하고 싶지 않다. 병을 더 확산시킬 뿐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할 일이 있다. 그런데 자리를 비울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스테그 교수는 극비 속에 10년 전부터 그를 돌보고 있었다. 대통령에게는 마스트리히트 조약문제에 관한 텔레비전 토론 다음에 수술을 받을 권리만 주어졌다. 토론 상대자는 필립 세갱이었고 날짜는 1992년 9월10일이었다. 방송을 마치고 그는 나와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들기 위해 외출했다. 저녁 10시, 그는 극비리에 코섕병원으로 들어가 스테그 교수 단독 집도로 수술을 받았다. 병원장인 드브레 교수는 마지막 순간에야 그 병원에 고위 인사 환자가 왔다는 것을 통고받았을 뿐, 수술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Chapter 7 전립선암ㆍ웃음ㆍ신앙ㆍ죽음이라는 것 중에서
---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