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원래 유대교에서 신에게 바치는 희생=번제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홀로코스트’라는 용어는, 유대인과 나치 사이에 어떠한 형태로든 종교적인 대응과 연결이 있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것은 비록 사이비일지언정, 나치의 ‘사제적(祭司的)’인 역할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들어가며_홀로코스트란 무엇인가
반유대주의는 결코 근대에 생겨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함께 오랫동안, 몇 천 년에 걸쳐서 그들의 존재를 따라다녔던 것입니다.……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집적된 이러한 편견을 거대한 국가권력을 이용해 한층 첨예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제1장 홀로코스트 ‘이전’
그것은 신에 대한 중대한 의문입니다. 철학자의 신이 아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 즉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고 “나의 규례와 법을 지켜라. 이를 행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목숨을 얻을 수 있다”(레위기 18:5)라고 약속한 신에 대한 중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비인간화와 살육의 현실을 본다면 유대인 포로들이 그 종교적인 삶의 방식과 신에 대한 신앙심을 잃어버렸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제2장 홀로코스트의 한복판에서
지상의 나라에서 신의 나라의 징표를 세우는 것은 가난한 자들, 차별받고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의 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는 기독교인에게 중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제3장 홀로코스트 ‘이후’
그러나 지금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는 순간의 아브라함으로 돌아가 보면, 그에게는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그 어떠한 보증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만 약속만을 받았을 뿐이며, 이 약속도 현실 상황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어떠한 반론도, 반문도 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그러나’도, ‘혹시나’도 입에 담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창세기 12:4)
창세기 텍스트는 아브라함이 며칠 밤을 못 자고 지새웠다고도, 또는 여행길에 오르면서 이별에 대한 감상적인 정경이 펼쳐졌다고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신의 부름을 ‘듣는 자’가 되었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응답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제4장 새로운 여행
확실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신의 권위를 증거로 내세워―‘왕권신수설’ 등―지배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에 대한 복종에 근거하여 인간에 대한 불복종, 즉 부정한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항거의 가능성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의 이야기를 통해 신이 인간의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면, 이제는 누구에게도 인간을 억압하고 희생하는 것은 허락될 수 없겠지요. 아브라함과 같이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신 이외의 어떠한 권위에도 따르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제5장 희생
아모스에 의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위선으로 가득 찬 예배를 행하고,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신의 선택에 전적으로 위반되는 사회적 부정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기존의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출애굽의 신으로서의 야훼를 이스라엘의 전유물이기라도 한 듯이 입에 발린 신앙고백을 남용하는 것은 허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모스의 눈으로 보면 ‘출애굽에 대한 도착(倒錯)’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제6장 출애굽
신이 몸을 숨겨 침묵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인간=이웃에 눈을 향하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정과 사랑은 ??밤??의 어둠을 타파하고, 이웃 가운데서 신의 모습을, 어쩌면 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신이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해도, 인간은 이 지상 세계에 대해 새로운 인간적=신적인 얼굴을 부여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며, 비젤은 그야말로 도발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의 불의를 인간의 정의로 전환한다’는 것입니다.---제7장 아우슈비츠의 원체험으로부터
이러한 전통적인 기독교적 구원론의 교의에 대해, 유대교는 몇 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왔습니다. 그중 가장 중대한 이의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전혀 변화되지 않았고, 메시아적인 구원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이후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 즉, ‘예수가 도래하지 않았던 편이 더 좋았던 것은 아닌가’(Fleischner, 1977).---제8장 에클레시아와 시나고그
실제로 엘리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현재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신전 붕괴 이래 가장 곤란한 상황에 서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이 그들의 약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강함으로 인해―그 권력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되고 남용되고 있는 것에 의해―평화적으로 살아남을 길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9장 예언자들의 예언의 빛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