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내려야 할 결정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도덕성보다는 정당성의 문제이다. (...)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상황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성경말씀도 직접 적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결정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거나, 간음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상식에 근거하여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 또는 상식 이하에 근거하기도 한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내 친구도 이렇게 하잖아!", "이 세상은 이것을 '성공'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이런 결정 과정에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아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지혜의 자원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인간의 생각을 믿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세세한 일들을 돌보시지 않는다는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 전지하신 창조사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앞길을 보여주기 원하신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어디에 속하고, 어디에 속하지 않아야 하는지 계획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를 구해야 한다.
그일라의 약탈 소식을 들은 다윗의 이야기는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좋은 예이다. 그리 유명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무엘상 23장에는 사울왕에게 쫓기는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윗은 수하에 몇 안되는 군사를 데리고 사울왕에 맞서 버티기도 힘들었는데, 그때 그일라가 블레셋 군대에 탈취당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는 하나님께 묻기 시작한다. "제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는 것이 옳습니까?" (2절). 유의하여 보라. 다윗은 예전에 하나님의 선지자에게서 기름부음 받았으니 어느 때, 어느 전쟁이나 이길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는 알고 있었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그가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하더라도 모든 기독교 사역이나 헌금 모금에 당연히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상황으로 인도하신다면 하나님의 공급하심도 따를 것임을 알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곳이라면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명하신 일을 해내는 데 필요한 지혜, 은혜, 재정,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하실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나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우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에만 있다. 하나님이 우로 이끄시는데 우리는 좌로 향한다면..? 우리 마음대로 가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계속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삶의 결정을 자기 마음대로 내리면서 하나님의 보호가 따르기를 원하는데,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선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는데(삼상 13:14, 행 13:22), 이는 그가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면 그일라의 블레셋 군대와 싸워도 승산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여쭈어 보았고, 이때 하나님은 싸우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무릎 꿇었다. "하나님, 제 수하의 군사들이 사기를 잃었습니다. 우리를 쫓는 사울왕 때문에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왜 또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가야 되느냐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이 전쟁에 나가야 합니까? 제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것입니까?"
대답은 역시 "그렇다"였다. "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불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삼상 23:4)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인 인도하심의 첫째 원리를 배운다. 그것은 우리가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다윗은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는지 몰라. 다시 한번 여쭈어 봐야겠어"라고 생각할 만큼 겸손했다. 그는 하나님과 24시간 끊임없이 교제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지도 않았고, 잘못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자부하지도 않았다.
몇년 전에 영향력 있는 TV 전도자에게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이 목사님께 이렇게 지시하셨는데, 이사회에서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전도자는 자신있게 "이사진을 모두 갈아치우겠소"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믿음이 담대한 것같이 들리지만 그 말에는 자기는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오만이 깔려 있다. 그후 오래지 않아 그의 사역체는 스캔들에 휘말려 무너지고 말았다.
재차 확인하는 것이 연약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 짝을 찾거나, 목사를 찾아가 자신이 묻고 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 pp 81~86
셋째로 다윗은 '자원하는 심령'은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심령을 주셔야 한다고 시인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자원하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정확히 파악하시고 "그것은 너에게 좋지 않다" 또는 "나는 네가 이것을 하기 원하고, 저곳으로 가기를 바란다"와 같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 안에 계신 하나님을 대항해 싸울 수 없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에게 순종하는 가운데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주실 수 있음을 깨달았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우리에게 강권한다. 하나님은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자!
다윗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을 배반할 수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의지가 세상과 육신이 원하는 바에 따를 수 있으므로 그는 하나님께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간구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성취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입술을 꼭 다물고 부단한 노력을 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와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원하게 하신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에게서 온다. 부질없는 노력은 그만두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강한 팔에 맡기는 것을 빨리 배울수록, 우리는 전과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붙잡으시며,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갈" 것이다(시 119:32). 그리고 실제로 그분의 뜻을 행하기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고로"(요 4:34. 5:30)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좀더 닮아갈 것이다. 예수님께는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짐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 pp 198~199
모세는 가나안 지경을 살피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다. 하나님게서는 이미 그 땅을 히브리 백성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미 수백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모세는 그 땅이 어떤지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정보를 얻기 위해 정탐꾼을 보냈다. 그가 그들에게 지시한 것은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의 거하는 땅의 호 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민 13:18~20)를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지리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백과사전에서 과제를 연구해 오라는 것과 같았다.
누구도 정탐꾼들에게 어떠한 결론을 이끌어내라고 하지 않았다. 싸움에 이길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라고 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승리를 보장하셨다. 그러나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10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임무 이상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확한 수치를 보고했고,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여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1~33). 이 보고는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모든 것들과 상반되는 것이었고, 그들의 상식적인 현실주의는 온 이스라엘 종족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성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 불평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이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를 건넜다. 그들은 그 갈라진 물이 그들이 다 건너갈 때까지 그 상태로 있을 것을 믿었다. 바로 그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힘으로 산을 뒤흔드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세가 받아 온, 하나님게서 친히 돌 위에 손가락으로 쓰신 십계명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사람들의 보고를 믿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선택이다. 성경은 이들 열 정탐꾼의 보고를 "악평" (민 13:32)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악한 보고"라는 뜻이다. 뭐가 그리 악한 것일까? 실제로, 그 보고내용은 정확하였다.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용맹한 부족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는 불신에 근거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깊은 낙심에 빠뜨렸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에 노하셨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은 변화되었는가? 우리는 자신의 느낌과 상황을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가?
--- pp 13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