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프랭클린은 오만에 빠진 편협함을 매우 경계하기도 했다. ‘사회생활 첫날’부터 제 몫을 해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젊은이들을 점점 더 좁은 분야로 밀어 넣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을 본다면 그는 아마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사회와 경제가 젊은이들에게 점점 때 이른 전문화를 요구할수록, 사람들은 시민으로서 적절한 자질을 갖출 수 없으며 직업 환경의 변화에도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프랭클린은 잘 알고 있었다.
정치적 속임수를 꿰뚫어볼 줄 아는 시민은 부와 권력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지킬 줄 아는 노동자가 된다. 그래서 교육은 어리석은 독재자와 거만한 특권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장치이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지난 몇 년간 시사평론가들(물론 이들은 대개 교양교육을 받았지만)은 사람들이 꼭 배움을 통해 뭔가를 발견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를테면 경제학자들은 집배원이 학문을 배우는 데 시간과 돈을 쓸 필요가 있는지, 차라리 그 돈을 저축해 집을 사는 편이 낫지 않은지 의문을 제기한다.
한편 사회학자들은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학생들이 자신의 경력 개발에 직결되지도 않는 불필요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교양 수업이 더 의미 있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정치가들은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선지 많은 이들이 교양과목이라 불리는 강의는 돈이 많이 들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엘리트주의에 빠지기 쉽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불만들은 제퍼슨이 처음 버지니아대학교 설립 계획을 발표했을 때나,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겠다고 했을 때 부딪혔던 반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경제적 욕망과 불안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교양교육은 늘 이런 비판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기 어려운 오늘날에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만약 대학 교육이 직업을 얻기 위한 훈련에 불과하다면, 교양교육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이 직업 역량을 키우는 형식적인 기관이 아니라 지식과 경험을 쌓는 곳이라면, ‘특정 직업’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자유로운 탐구를 소중히 여기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교양교육의 대상이나 범위를 제한하자는 요구에 맞서야만 한다.
---「들어가며」중에서
4년제 대학의 학사 교육과정(때로는 5~6년이 걸리기도 하지만)을 무사히 마친 학생들은 대개 대학 생활에 만족한다. 규모가 큰 공립대학이든 작은 지방대학이든 학생들은 대부분 캠퍼스에서 자신이 지적·사회적으로 성장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학에 쏟은 학비는 생각해볼 문제다. 충분히 심사숙고한 투자였는가? 장기적으로 대학 교육이 ‘제값’을 톡톡히 했는가?
통계를 보면 대학 졸업과 연봉 상승 간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학생과 부모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대학에 들어가는 돈이 현명한 소비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으며, 국가 차원에서도 대학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씨름해야만 한다.
갚을 길이 막막한 빚만 떠안고 정작 실망스러운 강의에 좌절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이쯤 되면 학생들은 애초에 자신에게 대학 교육이 정말 필요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나아가 교육이, 더구나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직업훈련도 아닌 대학 교육이 왜 중요한지도 갸우뚱하게 된다.
---「01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중에서
급격한 산업화 시대, 모든 사람들이 부를 찬양하는 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는 세태를 비판할 사람이 필요하다. 듀보이스는 ‘재능 있는 1할’에 속하는 젊은이들이 오늘날로 치면 골드만삭스의 인턴이 되거나, 교외에 별장을 가진 부자들 틈에 끼어들려고 애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에 성공적으로 편입되는 것은 재능을 제대로 사용하는 길이 아니었다. 듀보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유효한 말을 남겼다. “우리 사회는 선생을 가르칠 만큼 폭넓은 교양을 갖춘 인재들을 길러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문제없이 돌아가리라 낙관하는 것은 성공이라는 환상에 취한 산업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폭넓은 교양을 갖춘 인재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가리켰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지식의 세계를 열어주고, 학자들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야 했다. 듀보이스는 진정한 교육은 사회를 잠식하는 물질만능주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 교육이 자유로 가는 길인 동시에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는 학자를 길러내는 동시에, 타인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문화의 전도사를 길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02 교육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중에서
하버드 총장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James Bryant Conant)는 학부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학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학생이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질문을 던졌을 때 다른 답이 있을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시대의 견해는 어떤지 알고자 하는 욕구는 그가 교육받은 인간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교육은 정신을 인습이라는 속박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양분을 공급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생각하십시오! 지식을 흡수하고 자신보다 경험 많은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남이 자기 대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지는 마십시오.”
우리 자신의 자유와 독립은 남이 나 대신 생각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게 하려면 배움을 위한 배움, 즉 교양교육이 필요하다.
---「03 배움의 주체와 소비자 사이에서」중에서
1960년대만 해도 상업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형태의 교육은 그 나름대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50년 전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The Graduate)]에서 맥과이어는 “플라스틱에 미래가 있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감독은 맥과이어를 통해 물질 만능주의에 젖은 기성세대를 풍자했다. 교양교육의 개념과 그 효과가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당시 교육자들과 대중은 여전히 균형 잡힌 교육과 비판적 사고를 높이 평가했다.
20세기를 거치며 대학 학위를 받으려는 학생들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이 때문에 대학 교육을 받으려는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꽤 많다. 이들은 저임금 업종에 종사할 사람들이 문학이나 역사를 배울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표한다. 또한 왜 젊은 벤처기업인들이 자신의 웹 기반 아이디어를 상품화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하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이들이 보기에 우리는 모두 교육 시장에서 자신이 아는 것, 또는 알고 싶은 것을 골라 담은 ‘재생 목록(playlist)’을 사고파는 사람들이다. 대기업에서 더 좋은 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자격만 따면 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역사나 생물학, 정치학을 배우겠는가?
오늘날의 세상은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을 권한다. 금융권에선 ‘중개 배제(dis-intermediate)’라는 말을 쓰는데, 거래에서 중개 역할을 하는 단계를 건너뛰어 거래를 활성화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교육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파괴적 혁신’을 통해 교양교육을 중개 배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오늘날이라면 영화 [졸업]의 맥과이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젊은이에게 ‘디지털 미디어’나 ‘어플리케이션’이라고 속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즈음 관객들이 과연 이것을 풍자라고 생각할까?
---「04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교육」중에서
과거와 현재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대학의 변화’다. 과거의 대학이 정의롭고 옳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취업사관학교’는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 단어에서 풍기는 고상함 때문에라도 직접적인 폄하의 대상이 되긴 힘들다.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노출되어 있는 ‘과거와는 다른 공기’는 어떤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학생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경쟁완전체’란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일생이 경쟁이었는데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자본주의가 원래 그런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들은 원래보다 (조지 오웰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블 플러스’로 고통스럽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사교육을 받으면서 대학에 왔는데 취업을 위해 ‘9종 세트(학벌, 학점, 영어점수, 어학연수, 공모전, 자격증, 봉사활동, 인턴, 그리고 마지막은 충격적이게도 성형수술)’를 준비해야 하는 황당한 사회를 살고 있다. 대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고 또 스스로에게 한다. 이 사회를 탈출하지 못하는 이상, 정신적 무장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경쟁해야 하는가?’라는 대안 없는 비판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어차피 경쟁은 피할 수 없다’는 식의 수긍이 차라리 속 편하기 때문이다.
이 ‘주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자본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인 ‘민주주의’는 그 의미가 퇴색된다.
---「해제| 한국의 대학에서 교양강의는 이미 다른 의미가 되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