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덤덤한 서사 속에 역동적인 지성과 고결한 감성을 슬쩍 감추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충忠과 지智와 용勇이 있지만 배덕背德과 몽매함과 비겁함도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저자 진수陳壽는 은근한 서술을 통해 진취와 퇴행, 공익과 사리, 정직과 자기기만 가운데로 독자들을 끌고 갑니다. 거기서 무엇을 취할 것인가는 오직 독자들의 몫입니다.
누구나 《삼국지》 독법이 있습니다. 저의 삼국지 독법은 바로 ‘인仁’입니다. 난마처럼 얽히고 무수히 교차하는 길에서 어디로 발을 내디딜지 판단하는 마지막 기준은 결국 ‘어짊’입니다. (……)
위대한 역사책이란 사람들을 굳세고 지혜롭고 어질게 만드는 책입니다. 어진 사람이 굳센 마음과 지혜를 얻으면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보았을 때 떨쳐 일어납니다. 배가 가라앉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오나라 대장 오찬吳粲은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며 소리쳤습니다.
“배가 뒤집히면 응당 함께 죽을 따름이다. 사람이 위급한데 어찌 버린단 말인가!”
이렇듯 크게 어진 사람은 죽음도 함께하는데 하물며 삶을 함께하지 못하겠습니까? 인은 삶을 함께하는 사람을 만드는 자양분입니다.
---「책머리에」중에서
殺一人而失天下之心, 不可.(살일인이실천하지심, 불가.)
사람 하나를 죽여 온 천하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 조조, [무제기]
??? 196년 유비劉備는 하비下?에서 여포呂布에게 패해 조조에게 귀부했다. 조조의 모사 정욱程昱이 간했다.
“유비를 보니 영웅의 재질을 갖추었으며 심히 대중의 마음을 얻었으니, 끝까지 남의 밑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일찍이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지금은 천하의 영웅을 모을 때지 죽일 때가 아니라며 위와 같이 대답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조조는 유비에게 군대를 줘서 원술袁術을 치게 했다. 이로써 유비는 독립하게 된다. 조조는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이후 유비는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일어나고 일어나면서 조조의 최대 적수로 성장한다.
혹자는 조조가 유비를 살려두고 군사까지 줘서 놓아준 것은 어리석었다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조조의 판단이 옳았다. 당시 조조는 강대한 하북의 원소袁紹와 대적하고 있었다. 천하의 인재들이 원소 아니면 조조의 향배를 보고 있지만 대개 원소의 승리를 점쳤다. 유비를 죽이면 어떻게 귀순한 인재들을 추슬러 강대한 원소와 싸우겠는가? 조조의 심복들 중 원소와 내통하는 이들이 대단히 많았다. 또한 원소의 인재들 중에 조조 쪽으로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흔히 화의 싹은 자라기 전에 자르라고 하지만, 그것은 악의 씨앗에서 자란 싹을 말할 뿐이다. 유비 또한 영웅인데 그 싹을 자른다면 영웅들이 모이지 않는다. 조조는 영웅의 싹을 남겨서 영웅들을 거뒀다. 조조는 적수라도 영웅이라면 인정했다. 이것이 조조 휘하로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였다.
---「1부 위서」중에서
夫濟大事必以人爲本, 今人歸吾, 吾何忍棄去.(부제대사필이인위본, 금인귀오, 오하인기거.)
무릇 큰일을 이루자면 사람을 근본으로 해야 하네. 지금 사람들이 나에게 왔는데 어찌 버리고 가겠는가.
- 유비劉備, [선주전先主傳]
??? 적벽의 싸움 직전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거의 따라잡힐 지경에 이르렀는데 형주의 사졸과 백성이 유비를 따라 몰려들어 빨리 달아날 수가 없었다. 수하 사람들이 재촉했다.
“빨리 강릉으로 가서 수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많은 사람을 데리고 있지만 갑옷을 두른 이는 얼마 안 되는데 조공(조조)의 군대가 다다르면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그러자 유비는 위와 같이 대답했다.
유비는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진수는 그를 한나라 고조 유방의 풍모가 있다고 평가했는데 틀림이 없다. 조조는 중원에 기반이 있었고 가문에 기대어 일어선 사람이다. 손권은 아버지 손견孫堅과 형 손책이 일으킨 기반과 그들이 물려준 사람들을 데리고 강동에 웅거했다. 그러나 유비는 유씨라는 것 빼고는 무엇 하나 없는 사람이었으니 정말 출신은 유방과 비슷하다. 기량이 조조만 못하고 사람을 쓸 때도 인품을 고려했기에 조조만큼 여러 부류의 인재를 얻지 못했지만, 일단 사람을 얻은 후에는 조조보다 훨씬 넓은 아량으로 감쌌다. 그래서 유비의 사람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와 함께 패배를 받아들였고, 패배해도 와해되지 않고 다시 모였다. 동북의 유주에서 시작하여 동남의 서주로 갔다가 서남의 형주로 쫓겨갔다 결국 더 서쪽의 촉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패배는 그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벽에서 판세를 뒤집고 한중을 차지해서 삼국 정립의 기세를 만들었다.
기반이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일어나는가? 남다른 용기와 사람 사랑으로 일어난다. 갓 귀부한 이들도 버리지 못하는데 오랜 사람들을 버리겠는가? 관우와 제갈량이 한줌의 힘도 남기지 않고 유비를 위해 쓴 것 은 그런 까닭이다. 형세가 불리할 때 손권은 툭하면 위나라에게 자신은 속국의 번신이라고 몸을 낮췄지만 유비는 아무리 불리해도 굽히지 않았다. 조조라는 천재가 없었더라면 천하는 분명 유비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2부 촉서」중에서
船濟水, 將誰與易.(선제수, 장수여역.)
한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중인데, 중간에 누구를 바꾼단 말이오?
- 손권, [오주전吳主傳]
??? 나이 든 손권은 초심을 잃고 혹리 여일呂壹을 신임했는데, 여일은 남에게는 가혹하게 법을 집행했지만 공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는 술 파는 따위의 이권을 취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참소했다. 결국 그의 비행이 드러나자 손권이 대신들에게 인사 실수를 사과하는데, 그 조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손권은 말한다, 왜 대신들은 과감하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주지 않았는가?
삼국지의 세 호걸로 손권이 꼽히지만 그는 꼭 중간 정도의 사람이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도량은 유비의 반 정도고, 과단성이나 책략 등의 기량은 조조의 반 정도다. 그가 이끈 나라도 꼭 중간 정도의 크기였다.
아버지 손견은 불같은 열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여러 지방의 군사들이 모여 동탁을 칠 때 손견은 조조처럼 솔선수범했다. 손권은 아버지만 한 결기가 없었다.
형 손책은 어떤가? 그는 아버지처럼 호방하고 유비처럼 마음이 넓었다. 훗날 손권의 팔다리가 되는 노숙이나 주유도 모두 손책이 남긴 인물들이다. 손권은 형만큼 마음이 크지 않아서 훗날 장소에게 토라져 서로 어그러진다.
그럼에도 손권은 장강의 남쪽에 웅크리고 있다가 시기를 타서 북쪽을 도모하고 결국 자기 나라를 반석에 올렸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부끄러움을 견디고 굽히고 펴는 데 명수였다. 조조가 강하면 조조에게 화해하여 힘을 비축하고, 관우가 교만하게 굴어도 참아내고 결국 꺾었다. 그는 우스갯소리를 참 잘했는데,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주유나 여몽처럼 야전에 쓸 사람들을 고르고 일을 맡기는 데는 탁월했지만, 여일 같은 혹리를 쓴 것은 은근히 감시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나 조조 같은 황제의 풍모는 갖추지 못했지만 신하들을 하나의 목적으로 결집시키고 끌고 가는 군왕의 자질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손견과 손책이 명이 길었다면 손권이 제업을 이뤘을지 모른다.
---「3부 오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