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만금의 경우:초월적 소유에서 내재적 소유로
먼저 「새만금의 노모스」에서 황희선은 파도와 바람, 사람과 조개들이 함께 한 새만금 어민들의 삶과 투쟁이 기존 법의 소유권 개념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분석하고 있다. 국가가 공적인 이용을 위해 ‘관리’하는 수면인 공유수면(公有水面)은 국가가 간척을 결정하는 순간 소유의 대상으로 뒤바뀐다. 그에 따라 수면은 더 이상 수면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소외된 ‘상품’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수많은 어민들의 삶의 터전인 ‘뻘땅’이 ‘새만금’(‘새로운 만경 김제 평야’의 준말)이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이랬다.
황희선은 이처럼 경계 없는 바다에 테두리를 두르며, 일대를 매립해 개발해야 할 대상이자 사물로 만드는 국가의 소유를 ‘초월적 소유’라고 부른다. 국가의 소유는 그 공간에서 삶을 영위해가던 어민들과 생물들을 그 공간과 분리시키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삶과 생명과 그 공간의 독특성을 모두 무화시켜 ‘화폐’라는 단일한 척도로 환산하기 때문에 초월적이다. 그러나 어민들은 갯벌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갯벌과 생물들의 독특성을 그대로 보존하며 살아간다. 이를테면 새만금 어민들이 사용하는 채취 도구인 ‘그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뽐뿌배나 깔쿠리, 갯벌에 경계를 긋고 시장가치 측면에서 가장 유리한 종만 살아가게 하는 양식과 달리 “새의 것과 사람의 것”, “물의 것과 사람의 것”, “내년의 것과 올해의 것”을 구분케 해준다. 즉, 갯벌을 사람의 것으로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황희선은 자신들이 공간을 소유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공간이 자신들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어민들의 이런 생활방식을 ‘내재적 소유’라고 부른다.
갯벌에 속해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감으로써 함께 구성한 소유의 영역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어민들의 이와 같은 ‘내재적 소유’는 공간을 대상화함으로써 일종의 상품으로 만들어버리고, 그에 따라 그 공간에서 삶을 생산하는 능력을 무능력으로 뒤바꿔버리는 권력과 자본의 ‘초월적 소유’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다는 것이 황희선의 결론이다.
2) 대추리의 경우:코뮨적 신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신지영의 「대추리의 코뮨주의」와 김디온의 「지킴이의 입장에서 본,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싸움의 활력 만들기」는 미군기지 이전지로 결정된 뒤 국가가 추방을 명하고 고립시킨 평택 대추리의 주민들과 대추리 지킴이들이 그 추방명령에 맞서 전개했던 싸움을 통해 자신들 스스로 코뮨적 신체가 되어가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을 면밀히 기록하고 있다.
새만금의 경우에서처럼 권력과 자본은 일방적 통보, 삶의 화폐화(보상금 지급), 폭력을 통해 대추리의 들에 긴 철조망을 둘렀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철조망 너머로 씨앗을 뿌렸고, 그렇게 자라난 곡식들을 동지로 삼아 권력과 자본의 금지선을 넘어섰다. “올해도 농사짓자”라는 구호로 집약된 이런 농민들의 투쟁은 “삶을 구성하는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신체성”을 만듦으로써 “함께 소유한다”는 명분으로 재화를 독점하는 ‘국가적 공공’ 개념의 모순을 폭로했다는 것이 신지영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런 코뮨적 신체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김디온은 1년 여의 지킴이 활동을 되돌아보며 ‘대추리 코뮨’에서의 희망과 좌절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 농사법을 둘러싼 주민들과 지킴이들의 갈등, 남성과 여성의 배치를 구획해놓은 농촌의 가부장성, 지킴이들 간의 조직적·이념적 차이 등 싸움을 어렵게 만든 요소들은 공동체가 계속 생산적으로 소통하려면 무엇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개성 강한 사람들의 느슨한 조직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구성된 권력에 대항하는 일상의 힘이 어떤 가능성을 안고 있는지 등을 생각해볼 문제로 남겨뒀다는 것이다.
3) 이주노동자들의 경우:이동의 정치경제학
조원광은 「이주노동자와 이동」에서 “이주할 수 없는 이주노동자”로 존재하는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 특히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단속추방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삶과 활동을 통해, 이들 이주노동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로운 이동권’이 근대적 국민국가의 틀 아래서 만들어진 모든 권리와 제도들(특히 국적과 법)을 어떻게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조원광에 따르면, 권력과 자본은 작업장 선택권, 사업장 이동, 계좌 관리, 여권 압수, 인신적 통제 등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의 이동을 통제해야 이들의 저임금 강제노동을 강제할 수 있고, 통치상의 이득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의 이런 시도는 역설적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 즉, 사업장을 무단으로 이탈한 이주노동자들을 대거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 조원광의 지적이다.
그러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이동은 단순한 ‘도망’이 아니다. 이들의 이동은 자신들을 붙잡으려는 한국의 법이나 체계에 역설을 도입하고 내파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한국 내에서 ‘노동’ 이외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지만, 이주노동자의 방송국(MWTV)을 건설한다거나 이주노동자노동조합(MTU) 등을 건설함으로써 국경(국적)과 법의 본래 성격을 폭로하고 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정체성(‘노동력’에서 ‘노동자’로)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4) 중증장애인들의 경우:비인간의 탈인간 되기
이동권은 이주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물리적 공간에서는 물론, 지식·정보·교육 등 거의 모든 서비스 영역에서 이동과 접근을 차단당해왔던 중증장애인들 역시 이동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신체에 장애가 있으면 학교에 접근하기가 힘들고, 학교를 못 가면 직업을 구하기 힘들고, 직업을 못 구하면 경제적 사정이 안 좋아진다는 점에서 중증장애인들이야말로 권력과 부에 대한 접근을 차단당해온 대중, 서로의 소통과 연대를 차단당해온 ‘대중의 보편적 형상’이다.
「중증장애인, 비인간의 탈인간 되기」는 ‘인간생산 장치’라는 관점에 의거해 장애인을 둘러싼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사회가 어떻게 장애인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주고 있다. 현민은 ‘인간생산 장치’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특정한 삶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을 생산하는 권력”으로 규정한다. 한 사회는 이 인간생산 장치에 의거해 인간이란 신체적으로 유기체이며, 정신적으로 합리적 판단력을 지니며, 윤리적으로 인간적인 가치를 내면화한다고 부당하게 전제한다. 즉, 이 전제에 부합하지 못하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녀는 모두 장애인으로 취급받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인간생산 장치는 인간과 비인간을 폭력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사회로 하여금 장애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으로부터 사회를 보호케 만든다. 그러나 때로는 철도에 몸을 묶고, 때로는 한강대교를 기어가며,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투쟁 속에서 자유로운 이동권과 활동보조인제도를 요구하는 중증장애인들의 활동은 인간생산 장치로부터 인간을 ‘개방’하고 있다. 타자와 함께 있을 때에만 자립이 성립하는 중증장애인들은 ‘공립’(共立)의 개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비유기체인 기계와 결합해 활동한다는 점에서 ‘복합체’(더 나아가 ‘사이보그’)로서의 인간 개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두 개의 두뇌를 지닌 인간’, ‘바퀴 달린 인간’, ‘사다리 목걸이를 찬 히드라 인간’, ‘쇠사슬로 몸을 묶은 채 세상을 이동시키는 인간’으로서의 중증장애인들은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의 지평을 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