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로 개선 행진한 카이사르는 이후 10년 동안 독재할 수 있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지극한 존경을 표하는 의미에서 7월(July)에 카이사르의 이름을 붙였고(8월(August)은 스스로 신이라 칭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름에서 따왔다), 동전에 카이사르의 상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전통적으로 군주제를 상징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군주제에 반감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로마인들이 그냥 보아 넘길 리 없었다.
카이사르는 개혁가로서 시민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혹시 부와 권력을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현상 유지를 원했던 여러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왕이 되어 로마가 이미 기원전 509년에 폐지한 바 있는 왕정이 되살아날지 모른다는 구실을 핑계 삼아 암살을 모의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Ides of March)에 카이사르의 심장에 단도를 찔러 넣으며 거사는 성공을 거두었고, 로마는 곧 내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결국 로마 공화정이 무너지고 로마 제국이 설립되었다.
--- p.68,「Ⅱ 고대」중에서
이슬람 세력의 빠른 성장 이면에는 내부적으로 풀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생전에 무함마드는 후계자를 지명하지도, 새 지도자가 선출되는 절차를 마련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누가 무함마드를 계승해야 하느냐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Ali)는 후계자가 되기에 너무 젊다는 이유로 무함마드의 측근이었던 아부 바크르(Abu Bakr)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이런 결정은 후일 이슬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분란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편에는 선지자의 길(Sunna)을 따르는 수나의 백성들(Ahl Al-Sunna), 곧 수니파가 있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알리 지지자들(Shi’t’li)이라는 알리의 분파가 존재했는데, 이들이 오늘날의 시아파다.
--- p.94,「Ⅲ 중세 초기」중에서
탐험의 시대에 동양인들이 서양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나서지 않고 반대로 서양인들이 동양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을 중국과 관련해서 찾자면 이렇다. 유교적 관료들은 수백 년 동안 외세와 전쟁을 벌이면서 변화를 불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동양인들 입장에서는 동쪽이든 서쪽이든 탐험을 떠날 이유가 극히 드물었다. 자극을 주는 서양의 혁신이 거의 없었고, 발전이 더딘 작은 왕국들을 차지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인도양에서 교역이 일어나고 있는 마당에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태평양으로 새로 진출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동양인들이 발견의 기회를 놓친 원인이었다.
반면 서양 세계에서는 콜럼버스가 1차 항해에서 돌아오자마자 탐험 경쟁에 불이 붙었다. 특히 포르투갈이 동양으로 향하는 해로를 개척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이미 디아스가 10년 전에 시도한 바 있던 인도 항로를 완성하기 위해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를 원정대 책임자로 임명했다.
다 가마는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태운 아랍 항해사들의 도움으로 1498년에 인도 해안의 캘리컷에 상륙했다. 돌아오는 길에 괴혈병과 기아 및 질병으로 선원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는 등 극한 어려움이 따랐지만, 다 가마는 약간의 향료를 가지고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리스본의 환영 인파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다 가마는 2년이 넘는 항해 기간 동안 외해에서만 3만8,00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했지만 인도로 가는 해로를 발견함으로써 유명해졌다.
--- pp.158-160,「Ⅴ 서양 세계의 부상」중에서
마젤란의 탐험대는 남아메리카의 동쪽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폭풍우를 이겨 낸 끝에 1520년 10월에 또 다른 대양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발견했다. 새로 발견한 대양은 대서양에 비해 훨씬 잔잔했기 때문에 마젤란은 이곳을 ‘평온한 바다(Mar Pacifico)’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마젤란은 향료 제도를 찾아 헤맸지만,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크기를 과소평가했듯 마젤란 역시 태평양의 크기를 과소평가했다.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무려 두 배나 넓었다. 탐험대는 14주가 흐른 후에야 태평양의 작은 섬(오늘날 괌)에 도달했고, 여기에서 필리핀으로 항해해 들어갔다. 그러나 마젤란은 현지 족장들의 다툼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탐험대에서 오로지 후안 세바스티안 델 카노(Juan Sebastiandel Cano) 선장이 이끄는 한 척만 1522년 9월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인류 최초의 지구 일주였다. 비록 출정한 선원들 중 10분의 1 정도만 생환했지만, 26톤에 달하는 정향을 싣고 온 덕에 탐험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만회했다. 델 카노는 지구를 일주한 최초의 인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마젤란은 델 카노에 앞서 동남아시아를 들른 적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두 번에 나누어 일주를 완성했더라도 최초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인물로 마젤란을 기리고 있다. 항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험인 마젤란의 일주는 사상 최초로 지구의 실제 크기를 가늠케 했고, 지구를 한바퀴 돌아 항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 p.166,「Ⅴ 서양 세계의 부상」중에서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은 2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를,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 비용을 필요로 하던 나폴레옹에게 사들였다(나폴레옹은 같은 이유에서 카리브 제도의 아이티도 독립시켰다.). 거의 유럽 크기에 준하는 루이지애나의 편입으로 미국의 영토는 두 배가량 커졌다. 1845년 텍사스를 병합하면서 멕시코와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에 패배한 멕시코는 캘리포니아를 양도했다. 미국은 또한 1867년 러시아에게 720만 달러를 지불하고 알래스카를 사들였다(에이커당 2센트 정도에 구입한 셈인데, 오늘날 물가로 환산하면 30센트 선이다). 1898년에는 스페인과 10주에 걸친 전쟁을 벌인 끝에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얻게 되었으나 별도로 미국의 주로 편입하지는 않았다.
--- p.261,「Ⅵ 현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