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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 구효서 장편소설

구효서 | 해냄 | 2016년 04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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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4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36쪽 | 540g | 140*205*30mm
ISBN13 9788965745488
ISBN10 8965745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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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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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바니 시골 마을은 종일 조용했다. 엘린과 수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 소리를 리는 듣지 못했다. 그들은 리를 등지고 있었고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
―리! 수가 이곳으로 오겠대!
리는 석 달 전의 엘린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석 달 뒤에 있을 엘린의 변화를 어느 정도 예감했다. 수가 온다면, 엘린은 수의 부모가 될 것이다…….
수는 어린아이가 되어 돌아왔다. 엘린에게 듣던 것보다 그녀의 상태는 더 나빴다. 그녀의 기억은 새로 배웠다는 동양 언어의 분량만큼도 못 됐다. 새로 만나는 사람을 두려워했으며 익숙해지고 나서도 수줍음은 가시지 않았다.
리가 처음 내민 손을 그녀는 잡지 못했다. ---「From Now To Now」중에서

장관이 어느 병원을 방문했다. 주무장관의 시찰임무였다. 병원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장관을 칭송했고 지원에 감사했다.
시찰 때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이었다. 환자들만 불만이었다. 병원의 어려운 사정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장비와 인력 지원마저 끊긴다는 것을 병원관계자들은 너무 잘 알았다.
한 의사가 조용히 나섰다.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게 병원의 열악한 형편을 소상히 얘기했다. 말하는 내내 의사는 울먹였다. 장관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의사와 우정 어린 악수를 나누었다. 환자들은 의사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장관이 병원을 빠져나가자 장관의 수행원들이 의사를 조용히 불러냈다. 세탁동 건물 그늘에서 수행원들은 의사를 밟았고 늑골 두 개가 부러졌다.
병원장이 장관을 은밀히 두 번이나 찾아갔고 장관은 그때마다 병원장을 인자한 웃음으로 배웅했다. 병원에 별다른 불이익이 생기지 않았다. 물론 이익도 생기지 않았다. 불운한 의사의 늑골만 두 개 부러졌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남성 볼런티어가 대통령 직속 비리척결 위원회에 상세히 제보했다. 얼마 후 오스트레일리아인은 정부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다며 동료 여성 볼런티어 앞에서 허탈하게 웃었다. ---「From Now To Now」중에서

수는 그날의 햇볕을 잊지 못했다. 햇볕 없이 그날의 브램블 숲도 장래의 꿈도 떠올릴 수 없었다. 햇볕 때문에 브램블 숲은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웠고 햇볕 때문에 장래의 꿈이 여물었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데니 야드가 온통 신록으로 물들었다. 햇살이 가시넝쿨 사이로 부서져 내렸다. 수와 엘린의 맨어깨가 뜨거워졌다. 햇빛 때문에 둘은 웃었고 햇빛 때문에 행복했다.
빛 때문이었다. (……) 엘린은 수의 가슴 위에 엎어진 채 수를 내려다보았다. (……)
서로 응시할 뿐 꼼짝하지 않았다. 잠깐이었으나 그토록 기묘한 순간은 그 전에도 그 뒤에도 없었다.
수는 두려웠다. 하늘에 닿아도 결코 끝나지 않을 아득함이 엘린의 작은 얼굴에 드리웠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수는 알지 못했다. 기분 나쁘지 않은 두려움이 조용히 몸을 관통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뒀을 뿐이다. (……)
그 뒤로 수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고 아버지와 멀어졌다. 어머니의 일기를 읽으며 수는 어머니와 두 번 이별했다. 그럴 때마다 5월의 햇빛과 기묘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냥 왔다 가버린 순간이 아니라 수와 엘린에게 엄청난 힘을 주고 간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수는 여러 차례의 혹독한 이별을 이겼다. ---「그 후」중에서

곡물 창고 앞 소요는 계속되었다. 창고 문이 닫히고 더는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사투를 계속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인파는 먼지로 가려졌다.
리도 한때 그런 소요에서 등을 밟힌 적이 있었다. 투르카나 호 북서쪽 마을도 가난했다. 먹을 게 없어서 기약 없는 휴교령이 내렸다. 매일 줄을 서도 창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쩌다 열리면 사람들은 광분했고 밟거나 밟혀 죽거나 다쳤다.
어른 남자의 커다란 발이 리의 등을 찍었다. 숨이 막혀 넘어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저녁이었다.
감자에 알이 배기 시작하면서 휴교령이 풀렸다. 감자 죽을 먹은 아이들의 얼굴이 조금씩 피어났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반겼다.
적지 않은 수의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왜 안 와?’라고 물으면 ‘죽었어’라고 누군가 대답했다. 그리고 모두 책을 펼치고 곱셈 기초 공식을 큰 소리로 외웠다. 오, 만물의 하나님이시어―에 뭉구 응우부 예투…… 국가를 부르며 어린 리는 케냐를 구하고 정의로운 케냐를 지키겠노라 다짐했다. ---「그 후」중에서

그것은 ‘돌아오는 별’이었어. 내 부족의 기원이 담긴 애뮬릿. 그걸 갖고 내게 돌아오기를, 나는 수천 번 수만 번 기원하며 주디, 네 이름을 불렀어. 그것을 가지고 내게 돌아오라고 나는 너에게 말했지. 너는 그것을 가지고 내게 돌아오고 있었던 거야. 너는 몰랐을 거야. 애뮬릿에 새겨진 내 부족의 말을. (……)
나는 주디, 너를 사랑했어. 그 사랑을 끝내거나 정리하지도 않았어. 그리하지 못했어. 그리할 수 없었잖아. 너도 나를 사랑했어. 지금의 사태를 제대로 아는 것이 나를 사랑했던 너의 권리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알아.
그런데 나는 말을 못해. 못하겠다. 그래서 이걸 평화라고 할 수 없어, 주디. 너와 엘린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 나 혼자만 숨 막힌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종종 나는 어쩔 수 없이 슬퍼져. 너에게 미안해. 엘린에게도 나는 미안해. 이게 내 마음의 그늘이야, 주디.
이렇게 맑은 날 나는 깊은 그늘을 품고 널 보고 있다. 네 기억이 돌아와 모두가 알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우리가 평화로워질까. 그늘이 걷힐까. 그럴 리가. 혼란스럽고 두려워.
너는 지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를 보고 있을까. 엘린일까. 너는 아까부터, 한 그루 종려처럼, 아니면 내 안의 그늘처럼, 거기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 ---「그리고」중에서

새벽이 되어 수와 엘린과 리는 은라의 눈에 닿았다.
푸르고 차가운 안개가 살갗을 스쳤다.
분화구라고 하기엔 작았고 풍화로 만들어진 돌구멍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둥글었다. 거대한 볼(bowl) 두 개를 나란히 땅에 박아놓은 듯했다. 새벽하늘을 향해 입 벌린 그것들의 한가운데에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고여 있었다. (……)
눈의 내부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경사면에 돋은 다육식물들이 발에 으깨졌고 셋은 자주 미끄러지며 풀즙에 옷을 적셨다.
으깨진 이파리의 매운 향이 마른 바위 웅덩이에 자욱했다. 골프공이 모여든 자리에 서서, 수는 매운 냄새에 눈도 못 뜬 채 첫 기원을 외웠다.
―이대로.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이페에 이르는 고단한 여정 내내 속으로 중얼거렸던 말이었다. 그 한 마디를 위해 은라의 눈에 당도한 것이었다. 불편하고 피로한 순간들을 웃음으로 넘기면서.
―서로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이 평화가, 영원하기를.
수는 속으로 엘린과 리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이름을 이어 불렀다.
가까스로 매운 눈을 떴을 때 작고 둥근 하늘 한가운데서 새벽별이 반짝였다. 세 사람은 깊은 우물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엘린도 리도 어둠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는 순간이었다.
---「넉 달 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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