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있어서 19세기는 농민(민중)항쟁의 획기적인 시기였다. 농민항쟁은 19세기 이전부터 봉건적 사회모순이 첨예화되는 과정에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즉, 항쟁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소극적인 경제투쟁에서부터 폭력적 봉건지배체계에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농민들은 처음에는 개별적 저항을 벌이다가 차츰 집단적으로 저항하였는데, 농민항쟁의 가장 발달된 형태는 농민봉기였다. 이것은 단순한 민란의 단계를 넘어서 농민전쟁의 성격까지 띤 가장 대표적인 반전통사회운동이다.
농민봉기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스스로 무장한 농민 군부대가 편성되고 집단적으로 다양한 항쟁을 통하여 전통사회해체에 일익을 맡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순조 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란(洪景來亂)과 철종 13년 임술민란(壬戌民亂) 그리고 고종 31년 동학농민봉기 등이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으로서 농민이 주체가 된 조선봉건사회에 대한 극복운동이다.
19세기 평안도지역은 당시 조선에서 상품화폐경제가 가장 일찍 발전한 지역이었다.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게 된 원인은 대청무역의 통로, 금ㆍ은 산지라는 지리적 조건도 작용하였으나, 이 지역이 조선시대의 서북민차별정책에 의해 유력한 양반가문이 거의 없었고, 이에 따라 상업을 천시하는 유교적 관념이 크지 않았다는 사회적 조건도 작용하였다. 때문에 평안도 지역의 유향세력들은 다투어 상업에 참여하여 거대한 부를 장만하였고, 광산경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양반가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민출신으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자들은 향상된 사회의식을 바탕으로 지방단위의 권력은 비교적 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평안도가 일찍부터 봉건적인 사회관계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정부의 서북면 차별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서북지방의 신흥상공업세력은 1807ㆍ1808년초의 잠상금지와 광산개설 금지조치에 큰 반발을 하게 되었다. 이 정책은 평안도 지역의 향임ㆍ부상대가들로 하여금 봉건정부 타도운동에 참여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1810년의 전국적인 한발과 가혹한 수탈은 광부ㆍ사공을 포함한 광범한 기층민들을 하나의 농민전쟁의 대열에 합류시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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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이란 민중의 신앙현상 가운데 고대의 자연종교가 신앙ㆍ계승된 것을 중심으로 한 비조직적인 종교현상을 말한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풍부한 생활과 평안한 삶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되, 거기에는 교조(敎祖)나 체계적인 교리 및 조직적인 교단이 없다. 그러면서도 민중 사이에 계승되며 신봉되고 있는 것이 자연종교요, 그 잔류현상이 민간신앙인 것이다.
민간신앙의 두드러진 성격의 하나는 종교로서의 체계나 조직이 없다. 따라서 어떠한 체제에 구애됨이 없이 존재한다. 개인이나 가족이나 부락과 같이 자연인 또는 자연집단을 단위로 존재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흥종교의 하부구조를 구성한다. 말하자면 문화나 사회의 도처에 존재해 있을 수 있는 것이 민간신앙이다. 이러한 민간신앙에는 무속적 전통신앙ㆍ관습적 신앙ㆍ길흉신앙ㆍ주술신앙ㆍ음양풍수신앙 등이 있으며, 한국의 민간신앙은 무속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무속과 동제(洞祭)가 중심이 되고, 길흉 점복이나 금기ㆍ주술 등은 무속적 기능의 일부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행세를 하는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무(巫)는 초기 부족 내지 부족연맹의 종교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영고, 고구려에서는 동맹, 동예에서는 무천(舞天) 그리고 마한에서는 파종하는 5월과 추수하는 10월에 각각 제천행사를 갖었다. 이때의 사제자를 천군(天君)이라고 하고, 제사하는 성역을 소도(蘇途)라고 불렀다. 그리고 온 부족이 이곳에 모여 가무와 음주를 즐겼으며, 거기에 세운 긴 장대에는 북과 거울, 방울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 오늘날도 북과 거울과 방울이 무구로 사용되고 있어 이 제천행사는 천군이라는 무당을 중심으로 한 무교적 행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처럼 고대의 제천행사와 같은 의례를 통하여 우리의 조상드은 일찍부터 샤먼을 중심으로 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며 군장사회를 형성하고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국가성립 이후에도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전쟁을 수행하는데 무속신앙이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가무로서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리는 고대인들의 신앙은 그 원초적인 형태가 5세기 경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6세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수용되고, 특히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에서는 호국의 용신신앙이 시작되면서 무교신앙은 일대전환을 맞게 된다. 즉, 신앙형태는 여전히 부족적이요, 집단적인 고대 무속의 양상이었으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불교ㆍ유교ㆍ도교와 같은 타 종교와 혼합된 것이었다. 팔관회와 같은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즉, 팔관회는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금욕적인 불교법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음주가무를 위주로 한 행사로 실제에 있어서는 예로부터 행해오던 민족적 제전의 계승ㆍ반복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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