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이후 무렵부터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 탈국민국가를 지향하는 글로벌화 등, 역사적 환경의 변동에 따라 현대 수묵채색화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멀티한 신세대 작가들은 ‘한국화’의 지나친 이념적?관념적 울타리와 종래의 형식적 방법론에서 벗어나 일상적 삶에 기초한 자유로운 발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근대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와 결합된 ‘한국화’의 봉인을 뜯고 글로벌한 한국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근본적으로 다른 발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외래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한국화 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형식적 차원에서 타자화된 한국적 특질을 추구했다면, 이제부터는 나와 우리들 안에 우주와 동서고금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함께 있다고 보고 이를 일상적 삶의 문맥에서 발견하고 길어내어 거기에 맞는 형식을 창조해야 세계적인 한국화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 pp.21-23, 홍선표, 「한국 현대 수묵채색화의 형성사」 중에서
유화의 수용이란 단순히 서구로부터 들어온 미술 재료에 그치지 않고 미적 관점, 사물에 대한 시각, 미술 인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서양/동양이 우열의 가치로 서열화된 상황에서 서양화(유화)는 새로운 근대성을 담보하며 화단의 중심계를 점하였지만, 기실 ‘서양화’라는 명칭에서부터 자명하게 드러나듯이 정체성 논란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따라서 많은 유화가들의 중심 논제는 식민 상황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리면서 ‘조선적 유화’ 혹은 ‘동양적 유화’의 추구로 집약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견 정체성 확보를 위한 진통 과정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근대 유화사의 전개는 어느 한편으로는 유화의 방향성을 지나치게 내셔널리즘이라는 틀로 재단하는 성향을 고정시켰고, 광복과 군사정권 하에 ‘민족’과 미술에 대한 끈끈한 연결을 더욱 강화하여 한국 미술, 한국 유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미술이 민족이라는 절체절명의 집단성에서 탈출하여 작가 개인의 실존과 마주하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는데, 그 이유를 한국 유화의 태생적 요건에서 찾을 수 있겠다.
--- p.41, 김현숙, 「근대 양화의 전개」중에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 구상미술은 몇 가지 양식만으로 그 전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폭이 좁다. 물론 열거한 대표적인 표현양식에 들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확보한 작가들이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개별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소수의 특정 미술사조로 전체를 말한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현재 한국의 구상미술은 개인적인 창의성을 부추기는 비옥한 땅은 아니다. 비록 새로운 시대감각을 반영하는 표현 양식 및 형식이 아닐지라도 개성을 찬양함으로써 다양성을 부여하는 진정한 창작정신이 살아 숨쉬는 풍토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80년대 후반 이후 논쟁의 하나가 되고 있는 한국성, 즉 한국적인 미술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자기세계를 확립한, 개성 있는 작가 층이 엷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p.153, 신항섭, 「구상회화의 어제와 오늘」중에서
싫든 좋든 표현주의적 추상미술은 전후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그 미술의 출현 배경에는 전후의 사정이라는 특별한 역사경험이 내재해 있다. 이것이 앵포르멜의 직접적인 탄생이유이고 핵심사항이다. 이점을 간과한다면 대략의 줄거리를 빼먹고 디테일만 논의하는 격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미술 속에는 불운한 청춘을 맞았던 젊은이들의 아픔과 고뇌가 깃들어 있다. 이 점은 미술인들뿐만 아니라 6?25 동란을 경험한 사람들의 문제요, 우리 역사의 쓰라린 경험이기도 했다. 어쩔 도리 없이 맞닥뜨린 비극적인 현실을 그들은 고도로 긴장된 예술의 형식을 통해 그네들의 고뇌의 혼란스런 의식을 표출하였다. 이처럼 우리 추상회화는 아름다움과 질서의 구축을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처음부터 벼랑같이 위험한 아찔한 지형에서 자라났다.
--- p.200, 서성록, 「전후 추상회화의 지형」 중에서
자기 안위를 버리면서 정치적 억압에 대항했던 그 순수함에 대해 때로 감탄하고 때로 탄식하지만 오늘날 과연 그런 무모한 순수함을 또다시 미술에 요구할 수 있으며, 미술인들에게 그런 운동을 되살려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안타까운 물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증오감을 유발하기 때문에 순수함을 싫어한다고 말한다”는 말도 몇 번이고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우울한 광기”라고 지적하듯 “오랜 기간 동안 이들 반항아들에 대한 의도적 편견과 의미축소가 지속될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화단 내부의 섹트의 헤게모니란 것의 허망함을 우리 모두가 깨달을 때까지 사실상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한 우리가 유명화가를 만들기 위해 1980년대를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님에도”라고 하듯 그런 결과에 대한 자괴에 따른 회고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는 기대지평에 대한 낙망 때문일까. 정말 그때는 순수했고 그래서 그 순수는 이제 별 볼일 없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단순하게 특정 정권에 대한 반항으로만 그치고 만 것인가. 그때 우리가 만든 담론들이 예술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속성에 대한 깨침과 그 깨침의 연속으로 예술의 역할을 고찰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급한 현실대항이었을 뿐인가.
--- p.227, 강선학, 「무능의 급진성 속에서 80년대의 사회와 미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