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의는 주목할 만한데, 왜냐하면 이것은 현대인이 인간의 성에 대해 흔히 이해하는 바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성과학자(sexologist)는 사람이 지닌 성적 기질의 여러 측면을 구별해서 말한다. 우리의 “생물학적 성”(biologic sex)은 우리를 남성 또는 여성으로 규정짓는 물리적 기본 특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은 남성 혹은 여성됨에 대한 자아의 인식으로, 그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문화적 이해에서 생겨나며 대개는 생애 초반에 발생한다. 다음으로 “성적 지향”은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에로틱한 감정이나 성적 매력의 근원과 관련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동성 혹은 이성, 또는 어쩌면 양성 모두에게서 느끼는 성적 매력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동성애란 동성인 사람들로 인해 성적으로 흥분된 상태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겠다. 동성애자는 “동성에게 에로틱함을 느끼는”(homoerotic) 사람이다. ---「서론: 동성애와 기독교 성윤리」중에서
동성애를 동적 양상으로 간주하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두 기둥 사이의 연속이며, 대다수 인간은 둘 사이 어느 지점엔가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이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로 향할 가능성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우리의 “위치”란 반드시 고정되지 않고 요동치기 쉬운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고정된 행동 유형을 반드시 따르기보다, 실제로 동성애 행위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동성애자”라는 꼬리표가 틀림없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인간이 현재 보여주는 행동을 특징짓는 말임을 의미한다. ---「1장 현대의 관점에서 본 동성애」중에서
이러한 생각은 바울이 차용했던 헬레니즘 유대교 전통과 일치한다. 이 전통에 서 있던 신자들은 특이하게도 유대교 일신론을 통해 스토아 학파식 사고를 걸러내었다. 그래서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와 같은 말이 되었다. 그리고 바울의 저작이 반복하여 말하듯이 인간 행위의 근본 기준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있다. 이 목적(그리스어 telos)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도 나타나지만,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더욱 완전하게 드러나 있다. 볼프강 슈라게(Wolfgang Schrage)의 말을 빌리자면, 이 구속 사역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다시 한 번 계시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자연”을,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세계와 인생을 가리키는 폭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반대로 하나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모든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2장 성경과 동성애: 주해 관련 논의」중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글을 보면, 중세는 현대 이전까지 동성애 행위에 관하여 가장 섬세하게 도덕적 논증을 펼쳤던 시대로 보인다. 아퀴나스는 동성애 행위를 정욕의 6가지 유형(다른 5가지는 간음, 간통, 근친상간, 성적 유혹, 강간이다) 안에 넣었는데, 이것들은 성 행위의 올바른 목적에 배치되는 행위였다. 6가지 중에서 동성애 행위는 남성이 했든지 여성이 했든지 상관없이 가장 무거운 죄로 여겨졌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동성애 행위는 자위, 수간, 부자연스러운 이성애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인류에게 부적합하고, 자연스럽게 성욕을 자극하는 행동에 상반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러한 행위에는 출산의 가능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아퀴나스는 이후에 동성애 행위를 특별히 중대한 죄로 간주하는 길을 열었다.---「3장 동성애와 교회의 가르침」중에서
겉보기에 서로 동떨어진 차원에 있는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사실상 길레스피는 사회 정의와 개인 성결을 한데 묶었던 구약 예언자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예. 겔 18:5-9; 22:6-12; 33:25-29; 암 2:6-7; 5:24-27). 같은 원리가 성결법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성결법은 피조물의 고결성뿐 아니라 사회 내 약자 및 피압박자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표명하고 있다. 사실 성경 저자들에게 이 2가지 염려는 별개가 아니라 정의 추구라는 전체 주제 속에서 서로 관련된 사항이다. 피조물을 고결하게 유지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을 위해 정의를 수호하는 단면이다. 그리고 성의 영역에서 정의란 인간의 성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에 맞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4장 동성애와 성경의 권위」중에서
성경적인 이해에 따르면, 성교는 성적 존재인 두 사람이 한 육체로 연합하는 행위와 관련된다. 그것은 두 사람이 그들 존재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하나가 되는 행동을 표상한다(예. 창 2:23-24; 마 19:4-6). 그 결과 성행위는 오르가즘에 이르는 경험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실제로 오르가즘은 성교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자위나 타인에 의한 수음[手淫]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성행위의 기능은, 두 남녀가 새로운 한 연합체로 결합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의식 행위인 성교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 두 성이 하나로 연합함을 육체적으로 (그래서 현존하도록)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5장 동성애와 기독교 성윤리」중에서
그러므로 글레이저가 호소하는 성경 본문들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보다는 도리어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성경 저자들은 동성인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덕목인 충실함과 헌신을 칭송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런 관계 가운데 성기를 이용하는 성적 표현을 해도 된다고 용인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인 게이나 레즈비언도 서로 돌보고 사랑하며 돕고 인정해주는 교우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관계가 사실은 우정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서로를 향한 그들의 헌신은 성기를 사용하는 성적 행동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교회가 이성 간의 결혼에나 적합한 언어로 이런 관계를 축복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6장 동성애와 교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