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육체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변경된 신체 조직을 세계에 재적응시키는 작업을 수행하려는 사람은 삶에 대한 취향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건강은 지적, 감정적 흥미가 오래도록 살아 있게 도와준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일치 혹은 불일치?를 향해 간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라퐁텐은 건강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신적인 노쇠가 방지되지는 않았다. 건강하지 못한 육체에 위대한 정신이 살아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정신과 육체가 서로 다른 속도로 쇠약해지기도 한다. 스위프트의 경우처럼 정신이 저항하려 애쓰지만 신체 기관의 퇴화에 압도당해버리기도 한다. 이런 경우 노인은 비참해져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일종의 ?어처구니없음?을 느끼게 된다.
알랭은 사람은 가능한 것만을 원하게 된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합리주의이다. 노인의 비극, 그것은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상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몸이 먼저 슬금슬금 뒷걸음질쳐 가버리는 것이다. 피로가 정신적 충동의 도약을 깨버린다. 노인은 뿌연 안개 저 너머의 추억을 더듬는다. 노인의 생각은 집중하던 대상에서 이탈한다. 그리하여 노인은 병리학적 사건이 없어도 일종의 정신병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극도의 불안을 몸소 겪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동기에서든, 이념적 동기에서든 노년의 입장을 변호했던 모럴리스트들은 노년이 인간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일종의 균형 감각이 작용하여 육체가 잃은 것을 정신이 얻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정신의 눈은 육신의 눈이 감퇴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비로소 뜨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정신은 한창 젊어, 더 이상 신체와 큰 관계를 갖지 않게 된 것을 기뻐한다라는 세네카의 말을 우리는 이미 인용한 바 있다. 주베르는 "긴 노년을 누리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정화된 사람들이다"라고 썼다.
톨스토이는 기력을 잃기 시작할 무렵 역설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인류의 정신적인 진보는 노인들 덕분에 이루어졌다. 노인들은 보다 선량하고 보다 지혜롭다.? 자기 사랑의 힘을 위고에게 납득시키려 애썼던 가엾은 쥘리에트 드루에는 70세에 위고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노년이 나의 육신에서 탈취해가는 그 모든 것을 나는 불멸의 청춘과 찬란한 사랑에서 쟁취합니다." 그러나 1878년부터 암으로 조금씩 쇠약해졌던 그녀는 노년을 그저 퇴화로만 느끼게 된다. "내 사랑에 몸을 의지해보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안의 모든 것, 생명과 기억력, 기력, 용기, 열정 등이 달아나고 무너져내림을 나는 진정 느끼고 있습니다."
주앙도는 신체적 노쇠와 함께 오는 정신적 풍요를 찬양한다. ?육체가 노쇠를 향해 하강함에 따라 영혼은 절정을 향해 상승한다.? 어떻게 무엇을 향해?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무언지 모를 미학의 이름으로 그는 체념을 권장한다. ?시야의 사정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죽음은 차차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별개의 것으로 동떨어져 있게 된다. 그것이 슬프다 하여 기품을 잃지는 말자.?
대다수의 노인들이 겪는 실제적인 여건을 고려할 때, 이런 정신주의적인 객설들은 터무니없는 것들이다. 배고픔, 추위, 질병이 반드시 어떤 정신적인 이득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가장 기본적인 근거조차 결여된 주장인 것 같다. 노년을 득도의 필수 조건으로 삼았던 신도교주의자들에게조차 노년은 득도의 충분 조건이 아니다. 육체에서 해방되어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금욕과 법열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체험은 나이가 들면 육체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반박한다. 노년의 초기에 신체는 예전의 기력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혹은 새로운 균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몸은 망가지고 육중해져 정신 활동을 방해한다. 1671년 60세에 불과했던 생테브르몽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내 정신은 육신으로 돌아와 한층 더 일체를 이루고 있다. 사실 이것은 다정한 결합의 기쁨을 위한 일치가 아니라, 정신과 육체가 서로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의 필요성, 상호 지탱을 위한 원조의 필요성에 근거한 것이다."
1943년 3월 19일, 지드는 노인을 보잘것없는 피조물로 만들어버리는 "노년의 자질구레한 모든 신체 장애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나의 정신은 육신에 대한 관심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다. 육체의 존재를 망각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내 작업을 말할 수 없이 방해한다." 요컨대 수단인 육체가 장애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노년'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노년, 이것은 끊임없는 승리, 극복된 실패를 말해주는 것이다.
--- 439 ~ 442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마침내 영원은 그를 마치 그 품에서 바꾸어놓는다. 죽음은 시간을 소멸시킨다. 우리가 매장하는 이 사람, 그의 마지막 나날들에 다른 날들보다 더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의 삶은 그 부분 부분이 모두 죽음에 차압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두 동등하게 존재하며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빅토르 위고는 동시에 그리고 영원히 30세이며 80세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80세였을 당시에는 그가 사는 현재가 과거를 마멸시키고 있었다. 현재의 과거에 대한 우위는――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그렇지만――현재가 과거에 있었던 것의 쇠퇴나 혹은 과거의 부인인 경우 특히 슬픈 것이다. 옛 사건들, 예전에 획득한 지식들은 생명의 불이 꺼진 삶 속에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것들은 존재했던 것이다. 기억이 쇠퇴하면 그것들은 하찮은 어둠 속으로 침몰해버린다. 삶은 마치 닳고 닳은 스웨터처럼 한 고리 한 고리씩 풀려나가 노인의 손에 남는 것은 오로지 형태 없는 털실 오라기 몇 가닥밖에 없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를 침범한 무관심이 그가 과거에 가졌던 열정, 확신들, 활동들에 이론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늙은 샤를뤼스는 단 한 번 모자를 들어올려 인사함으로써 과거 그의 존재 이유였던 귀족적 자존심을 망가뜨린다. 또 아리나 페트로브나가 노후에 미워하던 아들과 화해한 것도 그러하다. 루소의 말대로 모든 것이 헛된 수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고 이미 얻은 결과들에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게 되면, 과거에 그토록 열심히 일한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미켈란젤로가 그가 ?꼭두각시들?이라 불렀던 자기 작품에 대해 느꼈던 경멸감은 가슴 아픈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일생을 말년까지 쫓아가보면, 우리는 그와 더불어 그 모든 노력의 헛됨을 슬프게 느끼게 된다.
이런 낙담의 순간들이 그가 죽은 후, 그의 작품의 위대성을 해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모든 노인들이 사직자들인 것만은 아니다. 많은 노인들은 오히려 고집으로 그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 그들은 흔히 자기 자신의 풍자화가 되고 만다. 그들의 의지는 일종의 이성이 없는, 혹은 심지어 모든 이성에 거역하는 관성의 힘을 고집한다. 그들은 어떤 목표를 위해서 원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과거에 원했기 때문에 지금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인들에게서는 습관과 기계적인 행동들, 경직화가 창조를 대신한다. "노년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끊임없는 희극이다. 그것이 희극적인 것은 특히 그가 연기를 잘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게의 이 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 756 ~ 757
모든 인간의 상황은 보는 관점에 따라 외면성과 내면성,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외면성이란, 그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며, 내면성이란, 주체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여 초월해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타인의 노년은 앎의 대상이다. 반면 자기 자신의 노년은 자기의 상태에 대한 산 경험과 관련 있는 법이다.
이 책의 제`1부에서 나는 첫 번째 관점을 채택하여 생물학, 인류학, 역사?사회학이 노년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를 검토할 것이다. 제2부에서는 인간이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자기의 육체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가, 그리고 시간과 타인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또 어떤 식으로 그것을 내면화하는가를 기술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 두 연구 중 어느 것도 우리가 노년에 대해 정의내릴 수 있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노년이 환원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인간이 노년을 맞게 되는 방식은 계층에 따라 다르다. 늙은 노예와 늙은 귀족, 보잘것없는 연금을 받는 퇴직 직공과 오나시스 같은 사람 간의 차이는 엄청나다. 노년의 이런 개인적인 차이에는 건강, 가족 등과 같은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그러나 이 두 범주 가운데 하나는 대단히 광범위하고, 다른 하나는 아주 적은 소수에 제한되어 있어, 착취하는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대립을 야기시킨다. 일반적으로 노년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진술은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이 두 범주 간의 단절을 은폐하려 하기 때문이다.
당장 의문 하나가 제기된다. 노년은 정태적(靜態的)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의 결말이며 연장이다. 이 과정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늙는다는 개념은 변화의 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태아, 신생아, 어린아이의 삶도 연속적인 변화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정의내렸듯이 느릿느릿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결론 지어야 할까? 분명 그렇지 않다.
그러한 역설은 삶의 본질적인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매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不動)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그것을 우리는 노쇠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의 노인학 의사인 랜싱 씨는 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노화란 보통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깊으며,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죽음에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 머리말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마르쿠제는, 소비 사회는 불행의 의식을 행복의 의식으로 대체시켰고, 모든 죄의식의 감정을 비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비 사회의 행복 의식, 그 태평함을 뒤흔들어놓아야 한다. 그러한 태평함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 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 계급으로 취급한다. 프랑스는 노인의 인구 분포율이 세계 최고――전체 인구의 12%가 65세 이상――이다. 그런데 노인들은 가난과 고독, 불구, 그리고 절망의 형(刑)을 언도받았다. 미국 노인들의 운명이라고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지배 계급은 자기들이 표방하는 휴머니즘과 노인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를 타협시키기 위하여, 노인들은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편리한 결정을 취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면, 그것이 인간의 목소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살아나가는가를 묘사하고자 한다. 나는 수많은 거짓과 신화, 부르주아 문화의 상투적인 사고와 상투적인 문구들에 의해 왜곡되어 우리가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것, 즉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 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