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166센티미터에 56킬로그램의 여자는 비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56킬로그램은 결코 날씬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피트니스 클럽에서 ‘온 스타일’을 채널을 보며 사이클 바퀴를 돌리거나, 스텝퍼 위에서 절대로 내려오지 않는 여자들. 특히 러닝 머신 위에서 생수를 마시며 비지땀을 흘리는 여자들은 절대로 뚱뚱하지 않다. 그들은 비만 극복을 위해 피트니스 클럽에 오는 게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지금보다 조금 더 마르기. 한마디로 말해 ‘말라비틀어지기’이다. --- p.20
남자들이 ‘왜’ 라는 질문을 근원적으로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여자의 면전에다 절대로 ‘싫다’ 라는 말을 할 수 없도록 입력되어 있는 족속들이라는 걸, 스물넷의 나는 알지 못했다. --- p.38
그때 깨달았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일어난 모멸감은 절대로 학습되지 않는다는 걸. 실연을 이미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이 되거나, 그럭저럭 삼킬 만한 것이 되진 않았다. 애인과 헤어진 지 1년이 다 되었는데도 그때의 모멸감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자신의 커피 값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 p.43
“이 도시엔 왜 이렇게 잘난 노처녀들이 많은 거냐. 잘난 노총각들은 씨가 말랐고.”
“그 잘난 노총각들은 우리 같은 노처녀들이랑은 안 놀거든.”
은영이 소파에 누워 요가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요즘 노처녀들이 어디 노처녀 같애? 나이 오십이 다 된 우리 편집장만 해도 보기엔 딱 30대 초반이야.”
“모르는 소리! 남자들은 자기 여자가 어려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거지.”
과연 수컷들의 진실이란 자기 유전자를 전 지구적으로 퍼트려줄 젊은 난자들에게 향해 있는 것일까. 늙은 난자들의 교묘한 화장술이나 성형술을 알아보는 유전자 코드가 고릿적부터 핏속에 새겨져 있는 걸까. 이것이 자연이 정한 냉혹한 유전자의 법칙이란 말인가.
“괜찮다 싶으면 꼭 유부남 아니면 게이더라! 무슨 놈의 바닥이 이런지 몰라.”
“섹스는 고사하고 난 웰빙 기사 쓰면서 컵라면 먹는 이중생활이나 좀 청산했으면 좋겠다.” --- p.46
닥터 레스토랑. 《A》매거진 최고의 칼럼니스트이며 얼굴 없는 요리 평론가이다. 어느 매체에도 글을 쓰기 않기 때문에 그의 칼럼은 오로지 《A》를 통해서만 읽을 수 있다. 당연히 잡지의 판매량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유명세답게 소문도 많다. 《A》매거진 편집장과 친구 사이다. 잡지사 사주의 아들이다. 아니다. 실은 편집장이다(이 부분에서 편집장은 거품을 물고 혼절했다). 겉만 요란한 형편없는 레스토랑들을 폭파시키기 위해 등장한 요리계의 '유나바머'다. 소문만큼 사람들의 궁금증도 늘어만 갔다. 최근 잡지에 오는 독자 엽서의 50퍼센트는 닥터 레스토랑의 실명을 밝히라는 얘기일 정도였다. --- p.61
“7년 만인가요, 이서정 씨?”
“정말 미친 거 아니세요? 전 앞에 계신 분을 전혀 모르겠거든요.”
박우진. 그는 내 인생에서 5분 동안 같은 공간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5분은 내겐 5년처럼 느껴졌다. 나는 혼자서 박우진을 50분이나 기다렸다. 그 50분은 내겐 조선왕조 500년보다 긴 시간이었다. 7년 전 그날은, 시계의 분침과 초침이 녹아서 흐느적거리는 달리의 그림 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p.72
몸이 기름을 흡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 약은 성능이 뛰어나다. 특히 약이 축적되면서 첫째 날보다는 둘째 날에, 둘째 날보다는 셋째 날에 더 강력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문제는 기름이 ‘변’에 섞여 나오다 보니, 같은 곳에서 나오는 다른 것에도 기름이 섞여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실수로 방귀 한번 뀌었을 뿐인데, 동시에 기름까지 내뿜게 된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기름들은 팬티를 적시다 못해 바지까지 푸욱 적시게 될지도. 제니칼 복용자들은 팬티라이너나 생리대를 착용하기 바란다. 생리대 찬 남자라는 비난이 싫다면 제니칼은 멀리 하는 게 좋다. 이 미친 세상에선 뚱뚱한 남자가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여성용 생리대를 차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고자 하는 인간의 추한 뒷모습이다. ---- p.104
“박우진을 만났다구? 맞선 자리에서 너 찼던 그 사이코?” 간만에 함께 간 브런치 식당에서 은영은 샌드위치 안에 들어 있던 연어를 빼내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 간다고 했던 인간이 7년 만에 나타나? 그 남자 오줌발, 최고다 최고. 기네스에 올려줘야겠네. 나쁜 자식.” (중략) 아마 내가 그 남자의 주방에서 일주일간 일하면서 취재기를 쓰기로 했다고 하면 은영은 얼음을 씹어 먹다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여자 친구들 사이의 우정이란 그런 것이다. 한 남자에게 똑같은 증오의 눈길을 보내고, 동시에 열광하는 것. 어느덧 남자에 대한 취향은 비슷해지고 싫어하는 것도 비슷해진다. 10년 동안 한 침대를 쓴 부부처럼. --- p.136
만약 패션계에 ‘바로잡습니다’ 코너 같은 게 있었다면 이런 괴상한 캐릭터들이 많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각한 성형 중독에 걸려 분기별로 얼굴을 뜯어고친다는 스타일리스트 ‘앤드류 동’부터 아직까지 레즈비언이다 아니다란 소문이 끊이질 않는 모 브랜드의 디자이너,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다가 그의 남편에게 발각돼 은밀한 그곳을 ‘절단’ 당했다는 불운의 주인공 포토그래퍼 K까지 소문의 장르도 코미디와 공포를 넘나든다.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패션계는 소문의 왕국이었다. 그리고 소문에도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라는 코너가 있다면 박기자의 소문은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 넘버원이었다. --- p.147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눈앞에서 버스가 떨어졌다. 자동차들이 순식간에 무너진 상판과 함께 추락했다. (중략)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상상 속에 나타난 다리는 실제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공포스러웠다. 그 자리에서 우유를 전부 다 게워냈다. 아빠의 회색 바지에 그때 내가 토한 하얀색 토사물이 뿌연 날인처럼 남아 있었다. 아빠를 원망했다. 그때 눈을 감았기 때문에, 억지로 누군가 내 눈을 막았기에 상상 속에서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나는 어둠 속을 찢듯 밀려드는 아프고 무서운 광경들 때문에 잠시도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 세계를 지탱하던 한 축이 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져버렸다. --- p.158
그는 엘리베이터까지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기름 똥 싼 여자를 부축하며 이마에 키스까지 했다. 맙소사. 이렇게 다정한 남자를 앞에 두고 그런 실수를 하다니. 그깟 다이어트 알약 하나 때문에! 운동 대신 알약 몇 알에 살을 빼겠다는 속물근성 때문에 모든 걸 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더 끔찍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중략) 김민준에게 기대 마스카라가 뭉개진 채 울고 있는 내 앞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박우진이었다. --- p.195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나는 기부를 한다.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기부금 때문에 엄마에게 돈을 꾼 적도 있다. 이미 나사가 1천 개도 더 빠졌을 거란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하지만 별 수 없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 내겐 이 두 가지 욕망이 모두 다 중요하다. 그래서 남들 놀 때 눈에 불을 켜고 일하고, 일해서 번 돈으로 열정적으로 쇼핑한다. 영화광이 히치콕의 희귀 DVD를 사 모으고, 애서가가 절판된 펭귄북스 시리즈에 열광하듯 그렇게 말이다.--- p.205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며 산다. 이게 옳은 일일까. 이런 삶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패션지 기자들이 사용하는 ‘시크’ ‘엣지’, ‘잇 백’,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이 일상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듯한 이런 외국어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패션지를 고작 명품 광고나 싣는 한심한 된장녀 잡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렵게 섭외한 소설가 ‘폴 오스터’나 ‘샐먼 루시디’의 10페이지짜리 인터뷰 기사를 보여준다 한들, 사람들이 그 기사의 진정성을 믿어줄까? --- p.284
그 소설은 4년을 사귄 남자친구가 이별의 선물이라며 내게 건네준 것이었다. 책의 첫 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서정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책임지지도 않았고, 현재를 위로해주지도 못하면서, 미래까지 걱정하다니! 하지만 나는 옛 남자친구가 준 그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것이 20대의 마지막 연애를 마무리 짓는 내 이별의 예식이었다. 졸업 후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생은 다른 곳에’의 원래 제목이 ‘서정시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정시대.
나는 그것을 ‘서정의 시대’로 번역해 읽었다. 누군가 잡지에서 내 기사를 읽고 꿈을 키우듯, 나도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시대에 곧 탑승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희망의 근거가 요구될 때마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믿었다. ‘생은 다른 곳에’가 아닌 ‘서정시대’의 힘을!
---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