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말하는 판타지는 삶의 본질이 아니다
작가들하고 공동창작을 하지만 주로 제가 창작하는 게 많으니까 제 생각이 안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짧은 시를 써도 그 사람 생각이 안 나올 수가 없죠. 제 생각에 우리 사회는 닫힌 사회예요. 실제로 신분제가 없어졌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가 닫혀서 고착되고 세습되고……. ‘삶이란 게 이런 거다, 삶이라는 게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확률적으로 드물지만 실제로는 희망이 있다고, 드라마가 말하는 판타지는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니라는 걸 자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어떤 사람이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을 때 드라마를 보고 그런 판타지를 가지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옳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만든 것 같은 드라마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백마 탄 왕자가 와서 생기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현실에서는 매우 드물고, 만약 현실이라고 한다면 웃고 즐길 수 있어야 좋은 거예요. 제 드라마의 취지는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판타지를 통해서 위안을 받지 말라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삶이라는 게 고착화되어 있고, 현대 사회에서는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길도 별로 없고,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는 일도 다 허구다. 그런 판타지를 보며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모든 드라마가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제 드라마는 이런 데에 별로 희망이 없으니깐 그냥 웃고 즐길 수 있는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 p.60
다매체 시대에 TV 현실비판 코미디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비판 코미디를 하려면 비판 수위가 굉장히 세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회장님 우리 회장님’ 이나 ‘네로 25시’, 강성범이 했던 코미디 등 정치풍자 코미디가 굉장히 인기를 끌었던 것은 통제가 강해서 다른 언론이 막혀 있을 때 이런 코미디들이 빛을 발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에서 더 센 얘기를 하는데 방송이란 매체에서 뭔 얘기를 한들 그만큼 사람들 속이 시원할까, 이런 회의가 있어요. 또 방송이란 것이 비판 코미디를 하기가 힘든 매체 아닌가? 공적인 영역에 있는 매체에서 비난의 수위 또는 풍자의 수위가 결국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 한계를 가진 코미디를 시청자들이 봤을 때 후련해하겠는가, 만족스러워 하겠는가에 대한 회의가 있어요.
전보다 비판 수위가 약해졌다고 느끼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배출구나 이런 쪽의 비판 수위가 좀 더 올라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 현실풍자 또는 정치비판 코미디들은 더 힘들지 않겠나 싶어요. 구조적으로 억압으로 못하게 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출 만한 센 거는 어쨌든 안 되니까, 그거보다는 다른 쪽에서, 워낙 다른 통로가 많아서 뭘 해도 만족스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 p. 134~135
예능의 본질은 김밥과 떡볶이, 영양가를 기대하지 마라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분식집에서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며 영양가를 따진다면, 분식집 가서 영양가 얘기하려면 비싸게 주고 먹든지. 돈은 많이 안 내면서 영양가를 바란다는 그런 면에서 말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진 거 같아요. 분식집도 고급 분식집이 생겼으니까요. 뭐 김밥도 만 원짜리 이만 원짜리가 나오는 시대니까요. ‘이게 그러면 그렇게 해야 되나? 고급 김밥을 만들어야 되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 그래 봤자 저는 예능의 본질은 분식이라고 생각해요, 고급 김밥일 수도 있지만……. 분식집은 턱시도를 입고 스테이크를 먹으러 오는 그런 식당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능처럼 싼 오락거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김밥천국에 고급 김밥도 있을 수 있지만 예능의 본질은 분식집이나 패스트푸드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영양가를 따지고 싶으면 제발 딴 데 가라, 딴 걸 사 먹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 p.187~188p
촌놈 정신이 국민 예능을 만들다
교양 피디하고 예능 피디하고 경계 자체는 지금 많이 허물어져가고 있고, 기본적으로 저도 그렇고 나영석 피디, 이우정 작가, 신원호 피디도 그래요. 기본적으로 저를 포함한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교집합은 본질적으로 프로그램에서 주는 메시지 자체가 따뜻한 감성? 그리고 사람 냄새 나는 것이 교집합이 아닌가 해요. 저도 촌놈이고 영석이도 충청도 촌놈이잖아요. 날이 서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본질적으로 프로그램의 핵심에는 그런 정서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한 게 아니라, 하다 보니깐……. (웃음)
(중략) 그런데 이것은 고전적인 예능 피디의 덕목에는 사실 없었던 거죠. 10년 전에는 예능 피디는 독하고 자극적인 웃음을 만드는 것이 덕목이자 프로그램의 방향성처럼 생각했었잖아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시대 흐름을 우리가 선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컬러들이 프로그램을 잘할 수 있는 자산처럼 된 거잖아요. 본인이 따뜻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 그런 척하려고 하면 한계가 오죠. 나쁜 놈이 착한 척하려는 게 보이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위악적으로 보이려 해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거는 타고난 부분들이 발현되는 거고, 예전 같은 패러다임이었으면 지금처럼 각광받는 피디가 못 되었을 수도 있겠죠.
--- p. 227~228
새로운 프로그램은 새로운 그림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프로그램이 후까시(위엄, 허세, 멋짐)가 포인트거든요. 요새 요리 프로그램이 많잖아요, 그럼 새로운 그림을 잡아야 하잖아요. ‘새로운 그림이 뭘까?’ 그게 굉장히 중요했어요. 〈복면가왕〉도 별거 아니지만 복면 쓰고 엄청나잖아요. 우리도 ‘이건 후까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땀방울 막 흘리고 멋지게 보여야 된다. 좋다, 스포츠!’ 스포츠 중계하듯이 하고, 관객이 옆에서 와 하고 환호하면 기존과는 그림이 좀 다르잖아요. 사실 프로그램이 다 그게 그건데, 그림 하나로 달라 보이잖아요. 그 그림 하나 나오기 전에 ‘이걸 해야 돼, 말아야 돼’ 했는데 딱 나오면서 ‘오케이, 가자!’ 그렇게 된 거예요.
--- p.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