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가 박부길의 연보를 작성하기 위하여 박부길과 두 번의 인터뷰를 하고 그의 작품들을 읽어 나간다. 박부길은 남해의 외지고 작고 가난한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고인 물과 같은 그 벽촌에서 14년을 산 박부길의 유년 시절은 이러했다.
어린 박부길은 집 뒤란에 있는 커다란 감 나무에서 떨어진 감을 주워 먹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 그러나 박부길에게 뒤란은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뒤란에는 헛간처럼 생긴 작고 어두운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방에는 앙상하게 마른 털 투성이의, 두 다리에 차꼬를 찬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집안 사람들이 모두 외출한 틈을 타 감을 줍기 위해 뒤안으로 간 박부길에게 그 남자가 자신의 손톱이 길다며 손톱을 깎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손톱깎이를 가져다 준 다음 날 새벽, 그 남자는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조용한 장례가 끝난 후 어머니는 말없이 집을 떠난다. 시간이 지나 박부길은 뒤안에서 죽은 그 사내가 고등 고시를 준비하다가 미쳐버린 박부길의 아버지이며, 집안의 결정으로 어머니는 친정으로 간 것임을 알게 된다. 큰아버지는 박부길에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아버지 대신 반드시 고등 고시에 합격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중학교에 진학한 박부길은 어느 날 학교가 파한 뒤 집에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선산을 불태우고 고향을 떠나 버린다. 특별하게 떠날 곳을 정하지 않았던 그는 그의 아버지가 고시 공부를 했다던 무극사로 향한다. 우연히 들른 무극사 근처의 한 식당에서 아버지와 함께 공부를 했다는 이를 만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당시에 몰락한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고등 고시 합격을 위해 공부에만 전념하다 미쳐버린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 후, 만화 가게 등을 전전하며 목적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박부길은 모아 놓은 돈이 떨어지자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고향의 교회 전도사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어머니와 재회한다.
경찰 공무원과 재혼을 한 어머니는 박부길을 중학교에 편입시키고 서울에 있는 먼 친척네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한다. 아무와도 사귀지 않고 습관처럼 학교를 다니던 박부길은 어머니의 눈물의 회유와 윽박지름에 못 이겨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친척 집에서 나와 학교 근처 방에서 자취를 시작한다. 고등학교를 진학한 후에도 아무와의 사귐도 없이 세상에 대한 가시 돋친 불만과 적의로 점철된 혼자만의 나날을 보낸다. 가끔 중지도라는 섬을 돌던 박부길은 비오던 어느 날 그곳에서 전투경찰 요원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한다. 그 충격으로 비오는 중지도에 한참 동안 죽은 듯 쓰러져 있던 그는 통금 단속을 피해 어디론가 피해 들어 간다. 그곳에서 들려 오는 맑고 고운 피아노 소리를 따라 들어갔다가 교회당 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김종단이란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 이후부터 그녀의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매일 교회를 나가던 그는 종단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종단의 권유로 토요일마다 있는 학생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만남을 한 후 더할 수 없는 심란함에 교회에 들른 박부길은 기도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처음으로 긴 시간 기도를 한다. 그 기도 소리를 듣고 있던 종단이 그에게 다가와 같이 기도를 해 주고, 박부길은 그녀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대신 신학 공부를 하여 목사가 되겠노라고 말한다. 신학교를 진학한 박부길은 기숙사로 옮기고, 종단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 간다.
하루는 종단이 박부길을 찾아 학교에 온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간 박부길은 그곳에서 40여 분간 그녀를 기다리게 된다. 교수를 만나느라 자신과의 만남을 잊어버린 그녀에게 분노를 느낀 그는 그녀의 뺨을 때리고 그녀에게 침을 뱉는다. 이 일로 종단은 박부길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무력증에 빠진 박부길은 학교도 그만두고 고등학교 때 자취를 하던 방에서 8개월 정도의 침묵의 시간을 보내다 입대를 한다. 제대 후 대학 선배의 시골 교회에서 무위도식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글쓰는 일을 통해 그동안 그를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을 씻고 아버지와의 화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