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화가들이 표상하는 몸은 우리 몸의 관습적 형태와 미학의 오래된 질서를 끊임없이 문제 삼는다. 몸은 절단되고, 왜곡되고, 다른 이질적인 요소와 융합되며, 과장되게 표현됨으로써 몸 주변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밖과 안,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꿈을 융합한다. 우리는 그들의 그림 앞에서 종종 질문하게 된다. 물체가 육체로 살아나게 되었는가, 아니면 육체가 물체로 굳어지게 된 것인가? 이것이 ‘내 몸’인가 아니면 ‘타인의 몸’인가? 몸과 세계의 경계는 어디인가? 초현실주의 세계 안에서 몸과 세계는 영속적인 변용의 욕망에 사로잡혀 지속적으로 상호침투하면서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동한다. ---프롤로그, p. 26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현실로서의 몸은 일종의 스크린처럼 심리적이고 몽환적인 내면의 풍경, 벵자벵 페레의 표현에 따르면 “최면의 풍경”을 반영한다. 이러한 풍경은 수동적으로 보이고, 탐험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몸의 감지할 수 없는 측면, 나아가 불가능한 측면을 드러내고자 애쓰는지를 보게 된다. 주관적인 이미지의 탐사를 통해 몸과 자연, 내부와 외부,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격과 경계들은 무너진다. 몸-풍경은 몸과 풍경, 몸과 거주지, 몸과 배경 사이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제1부 2장 몸의 풍경과 내면으로 향한 시선, p. 68~69
다다 시기 이후 엘뤼아르의 시적 여정은 부분과 전체를 공존시키면서 점점 여성 육체의 합일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엘뤼아르의 시에서 여성의 몸은 한스 벨머나 살바도르 달리의 경우처럼 예술가이자 관찰자의 욕망에 의해 절단된 것이 아니다. 시인이 신체 부위에 천착하는 이유는 롤랑 바르트가 “분할되고 찢겨진 여성은 대상들과 물신숭배자들이 훑는 일종의 사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언급한 병적인 페티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은 몸에 독립성과 발언권을 부여하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여성의 각 신체 부위는 마치 처음부터 몸의 전체에서 독립되었던 것처럼 나타나며 몸 이외의 다른 요소들과 자유롭게 결합한다. 눈, 손, 가슴, 다리, 손가락 등 각 부위는 생물처럼 움직이고 이동하고 자라나면서 자연과 독립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에 따라 여성의 몸은 늘 새로운 풍경으로 재구성된다. 여성의 몸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나타나는” 풍경과 흡사하다. ---제2부 1장 여성 몸의 풍경들, p. 85
콜라주는 서로에게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두 현실의 자의적 만남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이다. 그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찬양하는 로트레아몽의 문구, “해부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이 상징하는 것이다. 해부대는 실험실이자 변용의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해부대는 몸의 절단과 재구성에 관한 수술작업이 이루어지는 콜라주 자체이기도 하다. 몸의 이미지에서 이질적인 언어와 이미지가 몸을 이루기 위해 합쳐지듯이 콜라주에서도 이질적인 본질을 가진 요소들이 결합된다. 자의적인 만남들은 낯섦을 일으키고, 낯섦의 효과는 몸과 콜라주를 일상적인 맥락이나 환경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제2부 1장 여성 몸의 풍경들, p. 98
화가들과 시인은 서로 자유롭기 위해 결합한다. 글로 표현된 삽화라 할 수 있는 엘뤼아르 시의 단어와 구절은 그림이나 사진 속 이미지들에서 비롯되지만, 회화적 이미지들과는 별개로 특유의 상상력을 펼친다. 마찬가지로 그려진 시라고 할 수 있는 화가들의 삽화는 엘뤼아르의 시 텍스트에서 영감을 받지만, 고유의 독자성을 발휘한다. 엘뤼아르의 시집 속에서 화가들과 시인은 서로 자유롭게 꿈꾸기 위한 공동의 창작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제2부 3장 시와 회화의 상호교류와 ‘탈경계’의 몸, p. 182
데스노스가 즐겨 해부하는 또 다른 대상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다. 그의 시집들은 심지어 고유명사에 대한 해부실험 연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러한 연구의 의미는 그자비에 뒤랑의 지적처럼 “언어를 해부하면서, 우리는 그 비밀스런 하부조직들에 관한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어떤 것도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
데스노스는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름을 가지고 유희하기를 좋아한다. 이 이름들은 시인이 보기에 결코 자의적이지 않으며 그 이름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운명과 강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작가의 이름인 서명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그의 삶의 의미를 형상화한 것이며, 열쇠다”라고까지 말한다. 또한 그는 “그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의 운명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도록 영원히 운명지워진 이름들이 있다”고 말한다. ---제3부 3장 일상언어를 넘어서, p. 289~90
데스노스의 시적 공간 안에서 몸은 정신의 언어로 변모한다. 관습적인 몸이 파괴되고 재구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에 관한 유희들은 글쓰기의 해체를 동반한 다음 새로운 글쓰기로 변모한다. 그리하여 부정되고 재발견되는 글은 사회적 관습에 따르는 명확한 언어의 일상적 사용에 익숙해진 의식과 정신을 전복한다.
데스노스의 시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만들어냄에 따라, 미리 규정되지 않은 무한함에 열려 있게 된다.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인의 죽음을 천명하는 이유는 무화작용을 거친 글쓰기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데스노스의 시학의 힘은 몸의 거부에서 수용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글쓰기의 파괴에서 재구축으로 향하는 끊임없는 변용 속에 깃들어 있다. ---제3부 3장 일상언어를 넘어서, p. 298~99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페레 작품의 중요 테마로 ‘음식’의 테마에 주목한다. (……) 우리가 보기에 음식과 관련된 주제와 감각의 착란은 시인의 작품에서 높은 빈도수를 차지하는 삼키기와 토하기, 마시기와 오줌 누기, 들어가기와 나가기라는 몸의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들이 지칭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특별히 섭취, 소화, 배설이라는 몸의 세 기능에 집착하고 있다. 또한 그는 몸뿐 아니라 “땅, 요리, 위장에서 벌어지는 세 층위의 소화작용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 소화작용으로 표상되는 몸의 왕복운동은 페레의 시학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몸과 세계, 내부와 외부 간 소통의 방식이 될 뿐 아니라, 모든 세계의 경계, 모든 이분법적 한계를 무너뜨리는 시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음식을 부수는 행위와 그것을 소화시키는 행위는 해체작용을 거친 변신을 지향한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과 창작을 위해 부순 다음에 재구성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페레가 중시하는 몸의 내적 작용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나 시인들의 내적 작업을 환기시키는 효과 또한 가져온다. ---제4부 벵자멩 페레와 폭식하는 몸, p. 305~306
페레는 자신의 작품 속에 동화적 요소를 집어넣음으로써 “현실과 상상세계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인이 드러내고 보여주고자 할 임무로 생각하는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동화의 고유한 자질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페레의 몸 이미지는 표면적으로 이분법적인 두 질서 사이의 경계를 없앤다. ---……)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코, 작은 손가락, 반지 등이 갖고 있는 모든 성적인 암시를 고려해본다면, 동화는 어린아이의 세계와 에로틱한 세계를 동시에 연결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관습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 꿈과 현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함께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화의 양가적인 자질은 초현실주의자들이 꿈꾸는 이분법적인 것들의 무화가 지니는 욕망에 부합된다. 페레의 동화와 시는 모두 일반 동화에 고유한 “진정으로 낯선 결합을 창출해내고자 하는 욕망”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제4부 1장 동화적인 몸과 감각의 재구성, p. 309, 311
세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몸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동물, 식물, 광물을 막론하여 모두가 갖고 있는 필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몸은 유기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엘뤼아르에 의해서는 자연의 요소, 정신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내포하며, 데스노스에게서는 비물질적인 것과 광물질 또는 신화적인 요소를, 그리고 페레에게서는 음식이나 사물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이를 통해 몸은 공간과 시간의 보편적인 조건 밖에 위치하면서 모든 경계나 장르의 구분을 무너뜨린다. (……)
필자는 복수성(複數性)을 가진 초현실주의적 몸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초육체성le surcorporel’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려 한다. 이 용어는 아폴리네르가 ‘초-사실주의sur-realisme’라는 신조어를 발명한 후 일반화된 초현실성이라는 개념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브루닉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아폴리네르는 리얼리즘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리얼리즘을 강화하고 있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접두사 ‘초sur’를 붙이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초현실성이 “다양한 현실의 상위 조합”인 것처럼 초육체성도 다양한 육체성과 그 복수성을 아우르는 상위 조합이다. ---제5부 1장 낯선 몸, 친숙한 몸, p. 421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수많은 교류 속에서 시인들과 화가들은 서로에게 연결되면서도 자유롭게 활동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서로 근접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격하게 분리되기도 했다. 화가들과 시인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대로 몸을 일상의 규약에서 해방시키며 모든 표면적인 이분법적 구분들이 무너지는 지고의 지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초현실주의적인 새로운 몸을 창조해냈다. 몸, 언어, 세계는 분절되고 재구성되어 궁극적으로 세 시인과 화가들의 욕망에 의해 재창조되었다. 엘뤼아르는 융합하는 몸을 통해, 데스노스는 분열하는 몸을 통해, 페레는 삼키는 몸을 통해 자유롭게 초육체성을 탐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에서 부과된 금기와 한계들은 없어진다.
---제5부 2장 읽을 수 있는 몸, 볼 수 있는 몸, p. 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