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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 하며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 하며

: 조선을 움직인 23인 그 진실의 기록

윤용철 편저 | 말글빛냄 | 2008년 08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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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8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10쪽 | 468g | 152*223*30mm
ISBN13 9788992114332
ISBN10 899211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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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윤용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일어와 철학을 전공하였다. (주)두산동아 국제저작권팀장, 교보문고 편집장, (주)정보통신연구원 이사, 월간 「리눅스매거진」 발행인 (주)SuSe한국법인 대표이사 등으로 역임했었고, 현 서울교과서 대표로 있다. 편저로는 『조선왕조실록 졸기』『남한산성 굴욕의 47일』 등이 있다.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그들을 불러내어 역사 앞에 다시 세우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를 바탕으로 한 인물의 참모습과 정신,
우리에게 끼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조선 인물 청문회!


황 희 (1363~1452)

청빈하지 않았으나 청렴하였다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으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관후하고 신중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후 넓고 깊은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하여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정도 평화롭지 못해 곤경을 겪었다. 처의 형제인 양수와 양치가 법을 어긴 것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헛소문이라고 글을 올려 변명하였다. 또 그 아들 황치신에게 관청에서 몰수한 과전을 바꾸어주려고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였다.

맹 사 성 (1360~1438)

조선조 청백리의 최으뜸
고려 말~조선 초의 재상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사람됨이 종용하고 간편하며, 선비를 예절로 예우하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나고자 하면,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게 했다. 손님이 돌아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며 손을 모은 채 가는 것을 보고,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조선시대 황희와 더불어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맹사성에 대한 일화는 아주 많다. 일국의 재상으로서 비가 새는 초가집에 살았다는 일화나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는 일화는 지금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청백리인 맹사성도 뇌물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34권(1426년 11월 23일)을 보면 다음과 같은 상소문이 실려 있다. “--- 조대림, 맹사성, 권진 --- 등은 높은 벼슬에 있다해서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사오니, 죄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나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맹사성에게는 이미지에 크나큰 타격을 가한 씻을 수 없는 오점일 수밖에 없다.

김 상 헌 (1570~1652)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
조선 중기 문신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대표적인 척화론자로 추앙받았다. 고 저서에 『야인담록』등이 있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김상헌은 병자호란때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론자이다. 그 때문에 청나라로 끌려가 많은 고난을 겪었다. 실록에는 이에 대한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가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시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난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성 삼 문 (1418~1456)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 한 명. 성산문은 반역죄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의금부에서 올린 기록이 남아 있다. “이개, 하위지, 성삼문, 박중림, 김문기… 등이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할 것을 꾀하여, 6월 초1일에 거사하려 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에 해당합니다.” 세조는 그를 거열형에 처해 목숨을 빼앗는다. 조선 초기 뛰어난 학자였던 성삼문은 그렇게 희생되고 만다. 아울러 그의 삼족 모두 죽음에 처한다.
성삼문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도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쇠를 달구어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냈으나 결코 굴하지 않았다.

신 숙 주 (1417~1475)

그래도 공이 과를 덮는다
조선 전기의 학자, 문신. 세종 때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학자였으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신숙주는 성삼문과 정반대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그 때문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인정하지만 인간적 면모로서 그는 비난을 받는다. 오죽하면 ‘숙주나물’이라는 명칭이 생겼을까.

“신숙주는 천성이 고매하고 후덕하면서 활달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미치고 의논을 할 때는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하지 아니하였으며, 큰일을 결단함에 있어 통이 크고 막힘이 없어서 조야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의 잘못된 점도 실록은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를 섬김에는 명령만을 따랐고, 예종조에는 법을 집행함에 있어 공정함을 잃었는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임금의 총애가 바야흐로 성하였으나 자신이 옥에 갇히는 욕을 만났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아들 신정도 또한 베임을 당했으니, 슬퍼할진저!”

이 순 지 (1404~1465)

그의 딸이 사노와 간통하고
조선시대 최고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 예조참판, 한성부판사를 지냈다.

“세종은 역상(해, 달, 별 따위의 천체가 나타내는 여러 가지 천문 현상)이 바르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算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순지가 이를 연구하므로 세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었다.”

이순지는 세종 시대에 장영실과 더불어 최고의 과학자라 할 수 있다. 실록은 그의 업적을 칭찬하고 있지만 그의 과실도 다루고 있다.

“만년에 그의 딸(김귀석의 아내)이 사노 사방지와 간통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방지를 항상 여복을 입혀 여러 여종 속에 나란히 있게 하였다가 함께 동침하여 대관의 탄핵을 받게 되었으나, 임금이 치죄하지 않고 드디어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맡겼는데, 이순지는 잘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일을 송사하니, 사람이 모두 비루하게 여기었다.”

세종은 과학에 열정을 쏟아 부었으며, 그 과학의 기초로 수학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당시 가장 대표적인 수학자이자 천문학자가 이순지였다. 1427년 과거에 급제한 그가 처음 맡은 임무는 승문원에서의 외교문서 처리였다. 그 뒤 세종이 1432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 북쪽에 세운 높이 8m의 간의대라는 천문관측대의 책임자가 되었다. 전부터 천문 역산에 관심이 있었던 이순지는 이 기회를 통해 그가 추구하던 천문학에 깊이 참여,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평화롭지 못했다. 딸이 세조시대 최고의 스캔들인 사방지와의 간통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사방지는 턱수염이 없어 모양이 여자와 같은데다가 바느질을 잘하여 여자 옷을 입고 다녔으며, 일찍이 여승과 정을 통한 적이 있었다. 이 여승과 이씨가 이웃에 살았는데 이 여승으로 인하여 이씨가 사방지를 알게 되었으며 이씨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마침내 서로 사랑하고 가까이 하게 되면서 음식도 그릇을 같이 하고, 앉고 눕는 데도 자리를 같이 하며 의복도 빛깔을 같이 하니 모두 사치스럽고 화려하기가 극에 달했다.”
이순지는 이 일로 탄핵을 받고, 또 훗날 직첩을 위조한 사건으로도 탄핵을 받는다.

홍 윤 성 (1425~1475)

그 주인의 그 종 - "노복은 세도를 믿고"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2등에 녹선되었고, 세조 즉위 후 영의정에 올랐다.

“홍윤성은 용모가 웅위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젊어서는 가난하였는데 힘써 배워서 급제

하니, 사람들이 재능이 있는 웅걸로 기대하였다. 세조를 만나게 되자, 총애하여 돌봄이 매우 융숭하였고, 홍윤성이 본시 빈궁하였음을 알고 많은 양전을 내려주었다. 그가 재화를 늘리는데 힘써 홍산 농장에 쌓인 곡식은 몇 만 석이었고, 노복은 세도를 믿고 함부로 방자하여서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혹 때려죽이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을 도와 그가 세조가 되게 하는데 힘을 기울인 홍윤성은 지략이 있었지만 백성을 탄압하고 사리사욕을 채운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세조는 그를 매우 사랑하여 신하들이 그에 대한 탄핵상소문을 올리지만 모두 물리친다.

윤 원 형 (~1565)

흉악한 죄는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시대에 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였으나 영의정까지 올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강음에 귀양가서 죽었다. “처음 윤원형은 탄핵을 받아 재상에서 파면되었는데도 며칠을 지체하며 머물러 있다가 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그치지 않고 공론이 더욱 격렬함을 듣고 끝내 면하기 어려움을 알았으나… 첩 정난정과 더불어 강음에 있는 자신의 농가에 가서 거처하였는데 난정의 죽음을 보고 분울해 하다가 죽었다.”
을사사화, 그 살육의 주동자인 윤원형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말년에 귀양을 떠나 울분 속에 죽는다. 실록의 윤원형 졸기 말미에 사관은 그의 죄를 열거하고 나서 “기타 흉악한 죄들은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다 셀 수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저지른 패악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문정왕후가 죽자 그에 대한 죄목을 열거하여 그를 처벌하여야 한다는 상소가 삼사와 전국에서 봇물을 이룬다.
당시 그의 패악을 정리하여 왕에게 올린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 등의 상소문을 보자.

“전 영의정 윤원형은 본래 간사하고 음흉한 사람입니다. 국구國舅로서 왕실과 가깝다는 핑계로 공신의 자리에 참여했으며 영상의 자리에 올라 일국의 정권을 쥐고 임금의 위엄을 빌어 생살여탈을 제 마음대로 하였으며 대신들을 얽어놓아 망하고 흥하는 것이 그의 입에 달려 있었습니다…….”

허 균 (1569~1618)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
조선 중기 문신 겸 소설가. 시문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난설헌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허균은 역적으로 불린다. 『광해군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역적 허균이 하인준, 현응민, 우경방, 김윤황과 함께 서쪽 저잣거리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그때 임금(광해군)이 백관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이자 개혁가이지만 실록의 기록은 참으로 박정하다. 천재적인 영민함과 글 솜씨에 대해서는 아무 이론이 없으나 품성과 행동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그를 옹호하거나 칭찬하는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폄훼와 증오 섞인 기록만이 가득하다. 수번의 파직과 귀양 끝에 드디어 반역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기까지 그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그에 대한 독설 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은 광해군 10년 4월 29일의 기록이다.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일생에 해 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강상을 어지럽힌 더러운 행동을 보면 다시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요망한 참언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기이니…….”

광해군 역시 허균을 참형한 후 백성들에게 내린 반교문(담화문)에서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가 전혀 없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의 저잣거리에서 베어 죽이고”
그는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기피되었던 인물이었고 끝내 복권되지 못한 인물이다. 출중한 재능을 지녔고 시문에 뛰어난 천재였다. 몇 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천재성도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조정의 기대주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허균은 오십 평생 여섯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난다. 조선시대 허균만큼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이 색 (1328~1396)

독살인가, 자연사인가
고려 말의 문신, 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성계의 조선이 개국한 뒤 그의 요청을 물리치고 고려에의 충절을 지켰다. “이색은 변론하고 분석하며 절충하는데 저물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억하고 외우기만 하는 습관과 공리功利의 학설이 점점 없어지고, 성리학이 다시 일어났다.”
이색은 국운이 다한 고려의 끝에서 나라의 걱정에 수심이 가득하여 애틋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시를 읊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성계와 그의 추종 세력들에 의해 조선이 개국되면서 고려에 충절을 다하고자 했던 이색의 많은 친구와 제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조가 바뀌는 격변의 시기에도 살아남았음은 고려에서뿐만이 아니라 중국에서까지 그 명성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이색은 불사이군의 충절로 태조의 손을 뿌리치고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간다.
그는 한산 이씨의 시조이다.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성계가 어느 날 낙향해 있는 이색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나를 버리지 말아주게.”
친구의 이 말에 목은은
“나라 안에 내가 앉을 곳이 없잖소. 망국의 신하는 그저 낙향해 있다가 죽으면 해골을 가져다 고산에 묻을 뿐이오.”
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독야청청하고 대나무처럼 굳게 변함없는 절개를 지키며 살다가 이색은 여주 신륵사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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