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가 코기토와 상관적인 ‘표상적 진리’ 배후의 근본적 진리에 접근하는 길로 시어(詩語)를 내세운 이래, 현대 철학은 자신의 한계를 기록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문지방으로서 문학의 언어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문학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서 없어도 그만, 있으면 그저 약간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주는 진리의 여백이 아니라, ‘철학의 한계 개념’으로서 추켜올려진 것이다. 보편타당한 명제 수립의 규칙을 찾는 데, 또는 술어가 주어에 붙을 권리를 어떻게 지니는지 정당화하는 데에 골몰하던 철학은 술어 논리가 포착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지점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오르페우스의 수금(竪琴) 같은 노래 부르는 안내자, 바로 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pp.10~11
라캉에 의하면 텍스트는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나 작가의 관점이 개입된 서술 밑에서 언제나 무의식적 담론을 운반한다. 우리의 언어가 자아의 지배를 받는 의식의 담론과, 그것에서 벗어나는 무의식의 담론으로 분열되면서 뒤섞이듯이 텍스트에도 동일한 분열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욕망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 텍스트를 읽는 동안 독자는 의미와 이야기의 지배자가 되기보다는 텍스트가 불러일으키는 무의식적 효과에 지배를 받는다. 무의식적 담론은 독자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독자도 모르게 작용한다.
무의식은 나의 내밀한 소망이나 억제된 기억이 아니라, 시니피앙의 자율적 작용이 남기는 결과이고 주체를 벗어나는 알 수 없는 담론의 효과이다. 언어의 속성은 구조적으로 상호주체성과 시니피앙에 대한 주체의 의존을 전제로 하는데, 라캉은 그것의 절대적 지배력과 법을 ‘대타자’라고 부른다. 대타자는 시니피앙의 장소로 상징계의 구조를 떠받치는 언어적 토대를 말하는 것이지, 나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인격적인 제3자가 아니다. 결국 독자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신이 그것을 응시하고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텍스트를 매개로 대타자의 시선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언어의 본질적 속성이며 텍스트의 분열과 독자 의식의 분열에 의해 증폭된다. 결국 텍스트와 나의 위치는 독서 과정에서 능동적 입장에서 수동적 위치로, 즉 바라보는 입장에서 관찰당하는 입장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은 흔히 작품에 몰입하거나 감동을 느끼는 형태로 체험되지만 독자는 그 진정한 이유를 모를 수밖에 없는데, 의미를 잡으려 하는 순간 그것은 저 너머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 pp.26~27
이 문제에 대해 직접 답하기 전에, 작가가 독자의 자유와 주체성을 먼저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사르트르의 사유 체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자. 그의 사유 체계에서 ‘나’는 결코 ‘타자’의 자유와 주체성을 먼저 인정해줄 수가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까닭은 그것을 타자에게 인정해주는 경우 나 자신이 사물과 같은 상태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바로 ‘마조히즘masochisme’의 경우가 그것이다. 사르트르는 마조히즘을, 내가 타자의 자유와 주체성을 먼저 인정하고 나 자신을 객체성의 상태로 떨어뜨리면서 거기에서 오는 씁쓸한 쾌락을 얻는 관계로 규정한다. 물론 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는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실존의 고뇌’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다. 즉 나는 나 자신을 항상 미래를 향해 투기하면서 창조해나간다는 그런 실존의 힘든 과정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하나의 사물로 간주하게 되면 나는 즉자존재가 되어 실존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마조히즘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이 관계는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는 언제라도 나의 의식을 회복해서 타자를 다시 내 의식의 지향성을 채우는 한 사물과도 같은 존재로 출두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조히즘은 결국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으로 정의되는 ‘자기기만mauvaise foi’의 전형적인 관계인 것이다. --- p.62
예술 또는 문학이 초래할 수 있는, 주체성이 와해된 비인격적인 익명적 상태 안에 ‘타인과의 관계라는 조망이 개입하게 하는 것’이 레비나스가 생각하는 비평의 목표라고 우리는 이야기했다. 타인과의 관계라는 조망을 문학 안에 들여오는 것은 곧 문학 안에서 ‘주체성을 변호’하고자 하는 의도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타인과 관계를 갖는 자는 주체 외에 다른 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가 없으면 타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여러 비평적 작업은 바로 이런 타인과의 관계, 또는 주체성의 변호가 함축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 p.91
그러나 왜 문학에서 언어는 침묵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왜 사물들을 지우는 동시에 스스로 지워져야 하는가? 그러한 요구, 말라르메와 블랑쇼의 요구에 일종의 언어 ‘허무주의’가 있지 않은가? 〔……〕
본질적 언어가 음악이 되면서 침묵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언어 일반이 결코 말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즉 말하는 인간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무력의 상황과 죽음의 상황과 죽음으로의 접근에 대해?결국 바깥 그리고 바깥과 마주하는 급진적 탈존에 대해, 부재하는 최초 또는 최후의 ‘실재’와 그 ‘실재’를 향해 있는 인간에 대해?‘증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고,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 언어는 죽음을 최후의 확고한 사실로 허무주의적으로 선포하지도 않고, 더욱이 죽음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언어는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또는 죽음을 영위하는 삶의 찬란함을 말한다. 그 언어는 삶이 죽음과, 죽음이 삶과 만나는 순간의 강렬함을, 강렬함의 순간을,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 p.140, 142
메를로-퐁티의 철학사상에 따른 아방가르드 문학은 그것이 지닌 창조적 역량 속에 애매성의 사유를 가동시키고 있다. 지각의 원초적 차원에서 발생된 이 애매성의 구조는 다음과 같은 섬세하고 미묘한 담론 패러다임과 더불어 이 철학자 고유의 유비쿼터스 현상학을 구축하게 된다. 곧 도처에 뒤얽힘interwinement 현상을 생성시키는 존재론적 교착(交着) 능력으로서 이른바 키아슴chiasme 구도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 감각과 의미 사이, 실재와 몽상 사이, 현실과 상상 사이, 살과 관념성 사이에서 상호침투하는 역동적 애매성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유형의 에크리튀르럄riture(글쓰기 방식)로 물꼬를 트는 소설 이야기의 강독이란, 한마디로 모험이 된다고 하겠으며, 그 ‘내재된 의미’ 차원에 제대로 입장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되고 만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클로드 시몽과 누보로망Nouveau Roman도 인간적인 것과 선(先)인간적인 것 또는 인간적인 것과 비(非)인간적인 것 사이의 순환성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당연히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해석학적 전략 속에서 채택되고 있는 것이다. --- p.144
리쾨르의 문학론의 주요 알맹이인 상징 언어, 은유적 문장, 이야기를 담고 있는 텍스트 등은 모두 언어라고 하는 전체적인 현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중요한 언어의 알맹이들에 대한 리쾨르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리쾨르가 언어에 대해 갖는 근본적인 통찰을 엿보게 된다. 그 통찰은 다름 아닌 언어가 세계와 관계 맺으려 하고, 부단히 (세계)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언어가 세계를 지시하되 그 지시하는 방식과 수준의 문제다. 아마도 가장 덜 지시적인 시(詩)의 언어조차도 일차적 의미의 지시 대상을 넘어서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이나 은유, 이야기가 가리키는 세계가 직접적인 지시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면, 더 정확히 말해 직접적으로 지시 가능하며 오감(五感)으로 확인 가능한 세계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세계일까?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나 손으로 조작하거나 촉지할 수 있는 대상들과 사물들의 총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텍스트를 통해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열리고 발견되는 세계가 아닐까?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 삶과 관련된 다양한 기획과 제안을 시사받고 자극받는 세계가 아닐까? 나의 가장 고유하고도 본래적인 존재 가능성들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내가 살도록 제안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 p.180
들뢰즈 문학비평의 핵심적 작업을 꼽자면, 프루스트론과 카프카론이다. 이 두 가지는 들뢰즈가 평생 해온 작업의 구현으로서 각각 사유의 해방과 욕망의 해방을 노린다. 사유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발적 의지’ 같은 임의적 전제에 매개되지 않고, ‘기호’와의 마주침 같은 외부 자극으로부터만 필연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유의 해방이라는 과제가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욕망의 해방은 오이디푸스적인 시니피앙에 매개되는 과정을 욕망의 억압으로 이해하고, 이 매개 대신 욕망의 직접적 ‘표현’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들뢰즈의 바탕에 놓인 스피노자적 배경에 따르면 ‘기호’는 비진리의 영역에, ‘표현’은 진리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프루스트의 기호론과 카프카의 표현론은 서로 모순된 것인가? 들뢰즈 문학론은 이 대립 속에 두 동강 나 있는가? 이러한 우려 섞인 질문에 맞서, 이 글은 들뢰즈 문학론 전반을 하나의 일관적 구도 속에 집어넣어보려는 기획이다. --- p.208
푸코는 철학적 성찰 공간에 문학과 예술을 삽입하여 독특한 사유 체계를 형성하였고 철학적 담론이 맒할 수 없었던 사실을 ?명할 수 있었다. 즉 문학은 철학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유 공간을 푸코에게 제공한다. 결국 문학은 철학의 타자l?utre, 다시 말해서 합리적 사유에 의해 무시된 차원이다. 푸코의 에크리튀르는 전복적 공간과 일련의 미로를 열고, 그 속에서 합리적 주체를 전복시키고,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이의를 제기한다. 타자를 피력하면서 푸코는 사유의 한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푸코는 “사유되지 않은 바l'impense?받아들이고,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상투적인 사유의 경계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했다. 〔……〕 이러한 문학적 충격은 합리성을 동요시켜 사유에 새로운 장을 연다. 따라서 푸코의 작품 내에서 문학은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가 에크리튀르를 저항, 실험, 삶의 예술작품화를 지향하는 자유의 실천에 사용되는 “전쟁기계”로 만들기 위해 제 유형의 담론들을 해체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학은 동시에 숨겨져 있다. 푸코는 1950년대 강단철학과 단절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문학에서 발견하였고, 구조주의적 담론이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전략적으로 사용했으며, 문학에 힘입어 작가-작품-독자가 맺는 삼각관계의 심리화에 이견을 제기하면서 에크리튀르 행위 자체, 즉 파롤 형성, 주체성 생산, 자기창조 행위 등과 같은 운동을 위해 저자의 죽음을 단언할 수 있었다. --- pp.288~89
데리다가 규명하고자 하는 (글)쓰기는 제3의 기록이다. 그것은 텍스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수평적 구도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의 절대적 과거로 향하는 쓰기, 죽음과 망각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구도의 쓰기이다. 하지만 해체론의 관점에서 모든 수평적 구도의 쓰기는 이미 수직적 구도의 쓰기를 전제로 한다. 모든 언어가 어떤 ‘수행적 구도’를 함축하고 있다면, 그 수행적 구조를 낳는 사건은 역시 이 수직적 구도의 쓰기나 기록일 것이다. 김수영은 그런 의미의 글쓰기를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기술”이라 말한 적이 있다. 이 기술이 원초적 기록에 해당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다시 기형도의 시어(詩語)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그것은 “입 속의 검은 잎”(잎 속의 잎, 입속의 입)이다. --- pp.325~26
바디우는 베케트의 저작 속에서 인류에 대한 유적 사유를 찾는다. 만남을 통해 성립되는 ‘둘’은 남성적 입장과 여성적 입장의 실존을 나타낸다. 그 만남은 사랑의 만남으로서 유아론적 코기토의 고뇌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성의 ‘둘’을 도래하게 한다. 인류는 그러한 ‘둘’의 형상을 지니고, 그것은 사랑이라는 유적 절차에 의해 가능하다. 결국 베케트의 사유는 그렇게 사랑의 진리를 통해 인류의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케트의 글쓰기는 사랑의 진리에 대한 사유, 만남의 둘을 통해 파악되는 인간에 대한 사유이다.
--- p.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