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생겨나고 변하고 사라지는 것은 모두가 다 딱 그러한 적합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이 한 법이 부여하고 있으므로 일체가 모두 법 그 자체이다. 어떤 삿됨(즉, 인간처럼 감정에 의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없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또 자신이 한 개체에 갇힌 작은 존재가 아닌 이 법 자체라는 것을 알면 삶에서 모든 의심이 사라진다. 그러면 일체의 시비와 분별이 사라지면서, 스스로 자신을 묶었던 모든 집착과 욕심이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요, 깨달음의 열매이다. --- p.9
달마조사께서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 이입(理入)에 대해 말하기를
‘첫째 원리적인 방법이란 경전에 의해서 불교의 본질을 알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똑같은 진리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감각과 망상에 의해 가려져 있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라고 하여 일체가 이미 부처인데 사람이 스스로 감각과 망상에 속아서 자신이 부처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지만 식심견성(識心見性), 즉,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고 스스로 부처임을 깨닫는 중생자도(衆生自度)하는 최상승에 비해 대승은 너와 내가 있고 단계가 있다. 최상승과 대승을 분리하는 이유는 이러한 너와 나, 그리고 단계 때문이다.
그래서 달마 무심론 등, 선가(禪家)의 조사들은 보살도 아직 부처의 경지에 들지 못한다고 하여 함이 없는 부처, 즉, 해가 스스로 비춘다는 생각이 없지만 빛과 볕을 주어 모든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무위와 무심의 경지를 최상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일체가 본래 부처인데 스스로 감각과 망상에 속아 있으니 그것만 걷어내면 될 뿐, 다시 부처가 되기 위해 따로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최상승이다. --- p.181
“이보시오 원효대사! 지금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여기에 두고 그대는 어디로 가서 별도로 중생을 제도(濟度)하겠단 말이오?” 라고 자신에게 호통치듯 말했던 대안대사 말의 참뜻이 이해가 되었다.
정작 구제받아야 할 사람은 북촌 사람도 아니고 감천사 사람도 아니었다. 바로 중생을 제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도 분별심(分別心)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자신의 그 마음이 진정으로 제도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금강경(金剛經) 3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 보면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지니 ‘있는바 일체중생(一切衆生)들을 내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적멸(寂滅)케 하겠다.’라고 하라. 이처럼 모든 중생이 제도 되었으나 한 중생도 제도 된 적이 없느니라. 왜 그런가?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니라.”
라고 하였다. 그가 감천사에서 방울대사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은 부목이 부목다워야 하는데 원효는 지나치게 수행을 한 사람의 근본 자리를 드러내었기 때문이었다.
보살(菩薩)이 화작(化作)하는 모습은 즉 세속(世俗)에 들어가 중생과 같은 모습으로 같이 살아가면서 제도하는 것을 말하는데, 세속에 들어가는 것은 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十牛圖)에서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纏垂手)의 단계이고, 거기서 사람들과 어울려 교화하는 것을 화작(化作)이라고 한다. 화작은 심우도에서 이미 소도 없고 나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보살의 모습이 아니라 중생의 모습으로 제도한다는 것이요, 또 제도한다는 마음조차 없이 같이 살아가는 것을 일러 화작(化作)이라고 한다. --- p.349
대원경지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거울처럼 일체의 시비와 분별을 여의고 있는 그대로 비추어준다는 말이다. 무분별지나 대원경지나 같은 말인데, 여기에는 안팎이 사라지고, 대상과 나의 경계도 사라져 ‘나’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원효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알았다는 마음조차 버리고, 생각이 없다는 생각조차 버렸기 때문에 시장바닥에 뛰어들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먼저 시장바닥에 뛰어든 보임(保任: 보림이라고도 읽는다)의 스승인 대안스님과 함께할 수 있었다.
나는 참 공부의 끝은 이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도리를 아는 것은 이제 겨우 아이로 태어나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밖에 다름이 아니다.
밥을 먹고 운동을 하여 몸이 자라고 뼈와 근육이 튼튼해져서 제대로 생각도 하고 걷고 뛰며 일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 노릇을 한다고 하듯이, 이 도리를 깨치고 난 뒤에도 선사어록(禪師語錄)이나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을 통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기르는 보임 시간을 거쳐, 분별이 사라지고 내가 사라져서 무심(無心)이 되어야 비로소 이 공부가 끝나는 것이다. --- p.351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의술(醫術)은 총명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의술은 총명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또 이런 말도 한다. “말을 못한다고 아픈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의원(醫員)이 아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은 총명한 사람이 얻는 것이 아니다. 깊은 사람이 얻고 법을 전달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사람들을 마치 병자(病者)들을 대하듯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그가 얻은 깨달음은 휴짓조각보다 못하고, 설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보임(保任)을 통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깨달아도 안다는 것이 남아 있어 자신의 앎에 갇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안다는 상을 지어 그 속에 머물지 말고, 인연(因緣)의 세밀함을 살펴 일체 만법과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인연(因緣)의 산물(産物)임을 알아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에게 맞는 방편(方便)을 써 그에게 덮인 무명(無明)의 껍질을 벗겨 줄 수 있다. 이것은 총명함보다 깊은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깨달은 자는 부디 총명함을 내세우기보다 깊은 사람이 되어 병자의 병과 아픔을 살피듯 사람의 마음과 그 아픔과 인연을 살펴 그들을 자유의 땅으로 이끌어 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을 헤아리는 깊은 마음은 꼭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는 이것을 명심하여 좋은 인연으로 밝은 눈을 얻었을 때 애써 밝힌 등불에 그릇을 덮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연에 충실한 자요. 본래부터 아무 일도 없는 무심도인의 삶이다.
--- p.360